
7월 30일 대풍에 감사기도와 축제 개최
뜻밖에 대풍을 보게된 청교도들은 알맞게 비를 내려주어 대풍을 이루게 한 절대자를 칭송하는 경건한 감사기도와 축제를 절대자에게 바치기로했다. 지사 브래드포드를 비롯한 윈슬로 그리고 원로 브르스터같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감사기도와 축제가 준비되었다. 1623년 7월 30일 마침 탐스럽게 매달린 옥수수 알도 따사한 햇살에 영글어가고 물새들이 떼지어 하늘을 나르는 온통 대지가 축복받은 수요일 오전이었다. 플리머스 정착민 180여명은 너른 들판에서 모여 감사예배를 바쳤다. 그리고 첫 수확한 잘 영글어 알이 꽉 들어찬 옥수수와 콩, 그리고 호박으로 맛깔스런 요리와 바다에서 건진 대구와 청어 등 물고기와 조개와 대합, 칠면조와 사슴 등의 요리를 함께 나누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한 정착민들은 달리기, 공놀이, 활쏘기 등 게임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후 후세의 사가들은 이날의 감사기도를 추수감사절이라고 불렀다. 이후 북미대륙 정착민들은 가을 수확기인 11월 각주의 형편에 따라 공휴일로 정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89년 11월 26일을 국경일로 선포하고 추수감사절을 즐기도록했다. 그러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영국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국경일에서 제외하자 일부 주에서는 자의로 추수감사절을 가졌다. 그러나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1월 넷째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했다. 1624년 플리머스에 처음으로 암소가 도착했다. 그리고 주민은 1627년 156명, 그리고1629년에는 네델란드 라이던에서 35명이 합류했다. 점차 플리머스에는 정착민이 늘어나 20년후인 1643년에는 총인구가 2,000명에 이르렀다.
대추장 사후 노예로 팔려간 대추장의 자손들
1623년 3월 대추장 (마사노이트)는 중병에 시달렸다. 이 소식은 플리머스의 정착촌에 전해졌다. 에드워드 윈슬로우가 호바모크의 안내로 포카노케트의 대추장을 위문차 방문했다. 그러나 윈슬로우가 네마스케트 마을에 도착한 후 대추장이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윈슬로우가 포카노케트에 이르렀을 때 대추장은 다행히 심한 눈병으로 앞을 보지못할뿐 문병객과 함께 있었다. 윈슬로가 대추장에게 가져간 닭국물을 올리자 이를 마신 대추장은 점차 병세를 회복했다. 1661년 대추장이 81세로 사망할 때까지 왐파노아그 연방부족은 플리머스 정착촌을 비롯한 영국의 이주민들과 친교를 나누며 평화롭게 지냈다. 추수감사예배를 함께 드린 왐파노아그 대추장은 알렉산더로 개명한 장남 왐수타 (Wamsutta)가 계승했으나 그는 1년후 영국군에 구금되었다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사망했다. 필립으로 개명한 차남 메타코멭 (Metacomet)이 승계했으나 영국군과 불화가 심했다. 영국군과 교전시 브리스톨의 미어리 스왐프 (Miery Swamp)에서 1676년 8월 원주민 변절자 존 알데만 (John Alderman)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필립의 부인과 9살난 아들, 여동생 아미 (Amie)는 영국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이후 카리브 해로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절단되어 머리는 긴창에 매달린 채 플리머스 정착촌 정문에 전시되어 근 20년간 세워져 있었다. 그의 전신은 4등분되어 나무에 널렸다. 그의 절단된 오른팔은 트로피처럼 그를 저격한 변절자에게 선물로 전달됐다.
절대자의 충직한 도구 노예출신 스콴토의 최후
절대자의 도구가 되어 땅끝 신세계에 절대자의 복음을 꽃피우게 한 원주민 노예출신 스콴토는 그의 나이 37세에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청교도 정착촌 지사 존 카아버와 왐파노아그 부족연합 대추장 사이의 통역으로 할약하며 상호 평화조약 및 통상조약을 이끈 스콴토는 점차 그의 직위를 이용하며 사리를 취하게되었다. 특히 영국인들의 가공할 소총 등 화기에 겁을 먹은 원주민들은 청교도측에서 활동하는 스콴토에게 접근했다. 자연 스콴토는 이들로부터 “도와달라”는 청과 함께 선물도 챙겼다. 자연 그는 교만해지고 그의 부는 늘어갔다. 또한 그를 이용하여 영국에 반역을 꾀하려는 측은 마음대로 움직이지않는 스콴토를 모함했다. 이같은 모함에 대추장은 브래드포드 지사에게 스콴토를 처형하게 돌려보내라고 재촉했다.
1622년 포츈 호의 도착으로 대추장에게 송환이 연기되어 간신히 목숨을 구한 스콴토는 1622년 11월 브래드포드 지사를 안내하여 대구의 만 남쪽 지역으로 파종할 씨앗을 구하러갔다. 폭풍을 만난 브래드포드 지사와 스콴토 일행은 인근 마남묘이크 (Manamoyick)만에 피신했다. 얼마후 스콴토는 갑작스레 원주민에게 자주 발생하는 코에서 피가 흐르는 ‘인디안 피버’에 시달렸다. 이같은 증상은 치명적이었다. 스콴토는 자신의 종말을 예견하고 브래드포드 지사에게 자신이 소지한 귀중품을 영국인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선물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절대자가 있다는 천국으로 갈 수 있게 기도를 부탁한 후 1622년 11월30일 대략 37세로 사망했다. 스콴토가 정착촌에 모습을 드러낸 1621년 3월20부터 1년 8개월여만이다. 이처럼 짧은 시간 스콴토는 절망에 빠진 청교도민들을 아사와 원주민들의 공포에서 구하고 절대자의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있는 절대자의 충직한 도구로 일생을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