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4년 5월 13일 금요일부터 5월15일 일요일까지 (투박 출발 126일부터 128일까지)
해가 뜨자마자 일행은 힐라 강 남쪽 제방을 타고 길을 나섰다. 디 안자와 팔마 추장 두 사람은 일행의 뒤에 쳐져 이별의 섭섭함을 나누었다. 당시 팔마 추장은 전날 페이저스 사령관이 보낸 전령에게 4마리의 숫소를 돌려주느라고 미처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날 팔마 추장은 일부 유마인들이 몬트레이 수비대장이 디 안자에게 보낸 전령을 살해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진 나이 든 유마인을 데려왔다. 팔마 추장과 함께 온 유마인은 일부 유마인들이 디 안자 사령관에게 지역 안내인을 구할 정보를 전하러 온 몬트레이에서 온 전령을 살해하려고 디 안자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전하려 팔마 추장을 방문했다. 일부 유마인들은 디 안자를 찾은 전령은 자신들의 적인 코하트 부족들의 땅도 아니고 또한 몬트레이도 아닌 다른 적들의 땅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디 안자나 그의 부하들은 유마인과 코하트 부족간 화해를 권하나 이들 전령은 상호간 증오를 부추기는 적들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들 전령은 가축과 말을 가지고 있어 적들의 표적이 되었다고 했다. 이들의 외모도 문제가 되었다. 음모자들은 이들의 모습이 디 안자나 다른 혼혈인보다 더 이국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디 안자 사령관은 대원들에게 무슨 이유에서건 무력사용은 금하라고 대원과 팔마 추장, 그리고 나이든 유마인에게 당부했다. 디 안자는 팔마 추장에게 사태수습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엉뚱한 소동은 이틀만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카탈로니아 출신 파이저스 수비대장의 전령들은 무사히 몬트레이로 돌아갔다고 안내인 타라발을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 카타로니아 전령을 통해 타라발은 ‘팔마 추장의 노력으로 도둑맞은 말 2마리도 되찾고 범인은 엄히 다스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디 안자는 한 때 원주민들이 몰래 가져갔던 도끼도 되찾았다고 했다. 스페인과 원주민인 유마인간의 우의에 노력한 팔마 추장의 공로를 인정해 디 안자는 팔마 추장과 헤어지면서 권위의 상징인 자신의 단장을 팔마 추장에게 전했다. 그리고 4두의 소대가리와 각종 의상을 팔마 추장에게 전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진정한 우정을 이어갔다.
1774년 5월16일 월요일부터 5월21일 토요일까지 (투박 출발 129일부터 134일까지)
이틀간 디 안자 일행은 힐라강 제방을 따라 상류로 나아갔다. 제방 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제방주변은 5월의 신록으로 푸르렀고 온갖 들꽃이 주위에 만발했다. 흐르는 강물 소리를 따라 상쾌한 강바람이 전신을 감쌌다. 이틀간 일행은 27마일과 24마일을 주파했다. 5월 18일 일행은 코코마리코파 (Cocomaricopa) 부족들의 이동식 거처가 둥지를 이룬 마을을 지났다. 헤일수 없이 많은 마을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성정이 유순한 부족들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피마인도 섞여있다고 통역이 귀띔해주었다. 디 안자는 통역을 통해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고 했다. 일행은 부족들의 마을 근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디 안자는 이곳을 산버어디나도 (San Berdinado)라고 불렀다. 디아즈 신부는 이곳의 위도가 북위 33도 02부라고 기록했다. 코코마리코파 부족들의 체형이나 모습과 언어는 유마인들과 흡사했다. 대신 이들은 유마인들보다 더 좋은 무기를 지녔고 피마인들처럼 교양있고 외설스런 분위기는 숨기려했다. 일부 부족이 제방근방에서 생활하는데 비해 대부분 부족은 힐라강과 콜로라도강 사이 험준한 바위산 근방에서 생활했다.
다음날 일행은 아구아 카리엔테 (Agua Caliente)라고 알려진 규모가 큰 온천수를 지나 북으로 난 제방을 따라 달렸다. 다음날 일행은 남으로 난 제방을 따라 힐라벤드 근방 마지막 오파타 부족 (*Opata Tribe은 소노라의 중심부와 북동쪽으로 뻗은 산을 중심으로 오늘의 미국영토와 잇닿은 지역 부족이다. 유사 부족으로는 에우데베 (Eudeve), 테구이마 (Teguima), 호바 (Jova)가 있다. 오파타 부족은 16세기경 피마인들의 영토로 스며들었고 농지확장을 위해 관개수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관개수로는 유마인들과 전쟁때 대부분 유실되었다. 우파소이탁 (Upasoitac) 마을에서 디 안자와 일행은 까마귀가 나는 것처럼 투박으로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나 피마부족으로부터 극심한 가뭄을 유념하라는 충고에 따라 다른 길을 찾았다. 한편 알타수비대에 머물던 가르세 신부는 5월 21일 토요일 시종을 대동하고 일행을 앞질러 모퀴 (Moqui) 지방을 지나 뉴멕시코내의 스페인 정착촌으로 향했다. 이때 디 안자 사령관은 강줄기를 타고 투박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1774년 5월22일 일요일부터 5월27일 금요일까지 (투박 출발 135일부터 140일까지)
5월 22일 디 안자와 일행은 힐라강변에 자리잡은 근 2천여 명의 주민이 모여사는 피마인들의 마을 수타퀴손 (Sutaquison)에 도착했다. 부카렐리 지사의 지시에 따라 이 지역은 디 안자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필요시 디 안자는 이 지역 주민의 분쟁시 재판권을 행사했다. 디 안자는 강을 끼고 펼쳐진 평원을 따라 6마일가량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밤 이 근방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 마을인 후앙 까피스트라노 (San Juan Capistrano)에서 야영했다. 디 안자는 얼마전, 두 명의 전직 소노라 지사의 아들을 각각 마을의 시장으로 임명했다. 각기 두 시장은 근 3천여 명의 정착민과 원주민을 규합하여 약탈을 일삼는 인근 아파치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두 정착촌은 옥수수, 밀같은 곡물을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너른 농장에서 수확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일행은 강물을 따라 6마일가량 기름진 초원을 지나며 가축을 배불리 먹였다. 3마일 밖에 있 는 규모가 제법 큰 폐허가 된 목테주마 (Moctezuma) 궁전을 지났다. 건물이 흐르는 물속에서도 보이게 설계되어 있었고 자재는 진흙과 모래로 빚었다고 했다. 얼마전, 근처에서 아파치들의 약탈로 수타퀴손 주민 60여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소식을 듣고 디 안자는 병사들과 말이 장기간 여행으로 피로가 겹쳐 일부병사들은 노새를 타는 실정이라 걱정스러웠다. 디 안자는 가능한 빨리 위험지역을 벗어나려 오후 2시 힐라강 유역을 떠나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새벽녘까지 말을 달렸다. 오전 11시경 일행은 식수를 제공받으려 투그손 (Tugson)에 도착하여 점차 뜨거워지는 한낮의 태양을 피했다. 그리고 오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마을에 도착했다. 당시 투산 (Tucson)은 투박관활구역 내에 있었다. 그리고 80여 피마 가족이 살았다. 아파치들의 공격을 피해 일행은 30여 시간동안 물도 제대로 마시지못하며 근 72여 마일을 강행군했다.
5월 26일 새벽이 훤하게 밝아왔다. 투박에서 6명의 병사가 소노라 주의 부검사관 보닐라 (Don Antonio Boniila)의 잠시 입성을 지체하라는 전언을 디 안자 사령관에게 전했다. 전령은 가르세 신부의 탐험일지는 유마로부터 알타수비대를 거쳐 투박에 도착했다고 했다. 가르세의 전언으로 투박에서는 이미 디 안자의 도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날 디 안자와 대원들은 60마일을 달려 이른 새벽 피마인들의 산하비에르 델 박을 지나 1774년 5월 27일 금요일 일행은 투박수비대의 정문에 들어섰다. 근 5개월만인 140일만이었다. 1774년 5월 10일 산가브리엘 선교원을 출발한 지 17일만이다. 이처럼 디 안자 사령관같은 선구자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 전 세계인들의 선망의 지상낙원 캘리포니를 굳게 숨겼던 빗장은 서서히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