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변방 순회한 신부에게 자문을 구하다
18일 총독 관저에 초치된 발타사르 신부는 45일 동안 말을 달려 총독에게 제출한 안다루시아의 파리라 총독의 보고서 겸 요새신축 청원서를 세밀히 검토했다. 결론적으로 발타사르 신부는 원주민 반란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게 별도 수비대의 신설은 시급하다고 충언했다. 그리고 북부 피마지역의 원주민을 신민으로 다스리려면 더 많은 선교원과 선교활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새로 들어설 요새의 병사들은 현지 지휘관이 현지에서 모집해야 된다고했다. 수도 뉴멕시코같은 도시에서 모병한 병사들은 떠나온 고향생각으로 용감하게 인디안과 맞설 수 없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투부타마와 산이그나시오 선교원사이 물이 풍부하고 말먹이가 넉넉한 평원에 수비대를 세우고 경험이 많은 지휘관 아래 5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만약 이곳에 수비대가 들어서면 사나운 아파치때문에 머리를 앓던 테레나테 (Terrenate)와 프런테라스 (Fronteras) 수비대가 한 걱정 덜게되고 호로카시스타 (Horcasitas) 수비대도 캘리포니아 연안의 세리 (Seri)부족과 잦은 전투를 피하게 될 것이라고 발타사르 신부가 내다보았다. 발타사르 신부는 총독에게 파리라 지사는 소노라와 시나로아 그리고 누에보 비스카야 지방에서 모병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또한 파리라 지사에게 문제가 있다면 신설되는 부대에 필요한 대포나 소총같은 화기를 갖추는 것이라고했다. 실제 수비대를 신설하는데는 많은 재원이 필요했다. 발타사르 신부는 이 문제만큼은 위대한 지도자 기게도 총독께서 현명하게 해결할 것이라 말했다. 또한 수비대의 초대 사령관으로는 자신이 소노라와 시나로아를 여행할 때 접촉한 벨다레인 (Don Juan Thomas Beldarrain) 사령관이 적임자라고 조심스럽게 기게도 총독에게 천거했다. 그가 보아온 벨다레인은 아직까지 보아온 지휘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라고 칭찬했다.
참모회의, 수비대 신설을 가결
뉴스페인 최변방에 추가로 수비대 신설이 필요하다는 예수회 관구 발타사르 신부의 건의를 받은 기게도 총독은 부지런히 막료들의 또 다른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모두들 추가로 수비대를 세워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재무처는 21일까지 모병에 따른 신설 수비대의 운영비 등을 감안하여 별다른 의견을 보내지 않았다. 재무처의 총책임자 앤드루는 소노라 일대의 현재 상황은 누구보다도 총독 자신이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고 본다고 자신의 의견을 유보했다. 기사단의 알타미라도 발타사르의 의견을 참작하고 별다른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기게도 총독은 1월 27일 직속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참모회의 의장은 기게도 총독. 그는 뉴멕시코 총독겸 호르카시스타 (Horcasista) 지사, 육군중장, 백작 등 다양한 직위를 갖고 있었다. 소노라의 호르카시스타 (san Miguel Horcasista) 수비대도 그의 이름에서 연유했다. 참모회의에는 대법관 체바리 (Francisco A. de Chevarri), 산티아고 기사단의 마르퀘스 (Marquess), 재무청의 안드류, 황실법원에서 파견한 3명의 법관 등 근 20여명이 참석해 안다루시아 파리라 지사가 청원한 수비대 신설문제를 토의했다. 회의에 참석한 다수의 참모들은 수비대 대장 선임문제만 총독에게 일임한다는 것 이외에 병력 50명 규모의 수비대 신설에 동의했다. 그리고 수비대 주둔지 선정은 현지사정에 밝은 파리라 지사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폭도들에 대한 사면권도 파리라 지사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만약 폭동 이전처럼 평온를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소요가 발생한다면 지사의 재량으로 무력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결의했다. 이날 참모회의에서는 최근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주민 저항에 대비해 북부 피마 원주민 지역의 전 수비대에 별도로 소총 50정과 대포 4문을 지급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수비대장에게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지급하기로 했다.
1월말 총독은 북부 피마 인디안 지역에 들어설 수비대 50명의 병사가 소지할 50정의 소총과 창을 공장에 주문하고 전방 각 수비대에 배치할 대포와 권총, 창, 칼과 대포도 동시에 주문하고 완성되는대로 전방 각 수비대에 보내도록 조치했다.
먼길 떠나는 전령에게 격려금 전달
파리라 지사의 청원서를 기게도 총독에게 전달했던 전령은 요새 설립허가서와 이에 따른 각종 지침서를 가지고 이번에는 지사가 머물고 있는 산이그나시오를 향해 1,200여마일 멀고도 먼 길을 다시 달려야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구름을 벗하며 먼 길을 달린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건 외로은 모험이었다. 기게도 총독에게 파리라 지사의 청원서를 전한 지 17일만인 1752년 1월 31일 전령은 다시 지루한 여행길에 올랐다. 전령이 출발할 당시 루이스 사릭의 폭동은 거의 진정된 상태로 파리라 지사는 관저가 있는 산미구엘 호르니타스로 이전을 준비중이었다. 먼 길 떠나는 전령이 힘을 내어 달릴 수 있도록 총독과 총독의 참모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100페소를 전령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당시 귀하다는 장총 한자루의 값이 25페소. 장총 4자루를 구할 수 있고 야전용 담요 40여장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렇게 길을 떠난 전령은 각지에 알맞게 분산된 각 지방 관공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출발한 지 46일만에 무사히 산이그나시오의 굳게 닫힌 정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파리라 지사에게 총독의 수비대 신설허가서를 전달했다. 얼마후 투산 근방 투박 (Tubac)에는 산이그나시오 디 투박 (San Ignacio de Tubac) 수비대가 들어섰다. 무심한 세월은 흘렀다. 1775년 10월 투박 수비대장 디 안자 보우티스타 (de Anza Bautista)는 240명의 정착희망자와 1,000여 마리의 소와 말, 양, 염소 등 가축을 이끌고 미지의 땅 캘리포니아의 굳게 닫힌 빗장을 들어올렸다.
1776년 1월 4일 오늘의 로스안젤레스인 산가브리엘 선교원을 거쳐 이주대는 산티아고의 현지인 폭동을 진압하는 병사들을 지원했다. 디 안자의 이주대는 이후 몬트레이 (Monttrey)를 지나 1776년 3월 31일 안개 자욱한 샌프란시스코 야트막한 언덕에서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스페인 황제의 자랑스런 깃발을 바라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