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10주만에 ‘악마의 길’ 지나 LA 도착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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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산 남쪽 47마일 거리의 투박수비대는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1774년 1월 8일 (*필자 주: 일부 기록에는 디 안자 2세의 1차 탐험 출발일을 1774년 1월 8일로 기록. 아마도 그레고리안 일력 계산때문인 듯) 산타크루즈 강변 황량한 벌판에 마른 나무가지에 싹이 튼 듯 자리잡은 투박수비대 주변은 한 겨울 강바람이 을시년스럽게 차가왔다. 38세 장년의 디 안자 2세 사령관은 허연 입김을 뿜어대며 분주히 짐을 쌓고 싣는 대원들을 독려하기에 분주했다. 1772년 소노라 일대 신임 바카렐리 (Antonio Maria Bacareli: 1660-1660) 지사로부터 알타캘리포니아 탐험허가를 받은 지 근 2년만에 출발을 서둘렀다. 물론 스페인 황실과 뉴스페인 총독의 허락을 받은 뒤였다. 투박에서 47여마일 북쪽  산라파엘 계곡에서 발원한 190여 마일의 산타크루즈 강물은 파타고니아의 험준한 산맥을 지나 아리조나 남쪽을 스처 소노라 북쪽을 거치면서 투마카코리를 지난 후 남쪽에서 북쪽으로 잦아진다. 이처럼 장장 190여 마일의 거친 황무지를 지나면서 마른 나무가지같은 강물 주위에는 투산, 투박 그리고 카르멘과 투마카코리,  리오 리코 (Rio Rico) 같은 원주민 마을이 새싹처럼 싹이 텄다. 그 주위로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농사를 지으며 연명했다.
너른 수비대 연병장에는 병력의 절반인 24명의 병사와 대원의 시중을 들을 고용원과 통역, 5명의 노새몰이꾼, 가축몰이꾼, 피마부족출신 통역, 목수도 동행차 모여있었다. 그리고 양식과 원주민에 나누어줄 선물, 장비, 텐트 등을 실은 노새 35마리와 병사들이 갈아탈 말 140여 마리, 젓소 등 가축 65마리가 떠날 차비를 하며 지루한 하품을 했다. 이번 탐험에는 길 안내를 맡은 프란시스코 가브리엘 (Francisco Tomas Hermennegildo Garces : 1638,4.13-1781,7.19)과 디아즈 신부 그리고 성명 불상의 신부가 동행했다.

아파치 공격피해 탐험로를 변경하다
탐험일이 다가오자 디 안자는 탐험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애초 디 안자 사령관은 모하비 사막을 단독으로 주행한 가르세스 신부가 실제 경험한 탐험로를 따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발 며칠 앞두고 투박수비대는 아파치의 공격을 받았다. 아파치의 약탈로 애써 준비한 말을 다수 약탈당했다. 부득이 디 안자는 산가브리엘로 탐험하면서 모자라는 말을 보충해야 했다. 며칠간 고민끝에 디 안자 사령관은 가르세스 신부가 제시한 북서쪽을 통해 힐라 강과 콜로라도 강이 합치는 지점을 건너는 대신 스페인 통치력이 미치는 산하비에르 델 박에서 사릭(Saric)을 향해 남으로 전진하는 노선을 택했다. 되도록이면 아파치들과 마찰을 피하자는 것이다. 이같은 디안자의 노선 변경에 가르세 신부는 강하게 이의를 표했다. 자신이 몇차례 탐험하고 추천한 노선을 변경할 수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디 안자 사령관은 이번 탐험의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되도록이면 불필요한 아파치와의 마찰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황실의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을 지나가면서 부족한 말을 보충하는 길은 이같이 노선을 변경해야 만 가능하다고 가르세스 신부를 설득했다.
1738년 스페인의 모라타 델 콘도(Morata del Condo)에서 태어난 가르세스 신부는 15세가 되면서 프란시스칸 교단에 입회했다. 그리고 1768년 뉴스페인에 발을 디딘 후 투산 남쪽 산하비에르 델 박 (San Xavier del Bac) 선교원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일찌기 원주민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가르세 신부는 부임 후 인근 원주민 마을을 즐겨찾으며 이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특히 가르세 신부는 힐라 강 주변에 사는 원주민 전교에 힘을 쏟았다. 두차례 힐라 강 주변 원주민 마을을 찾은 가르세 신부는 1772년 드디어 알맞은 장소를 선정하여 새로운 선교원을 세우기로 했다. 가르세 신부가 힐라강과 콜로라도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통해 강을 건너기로 했을 때 마침 내린 장마로 가르세 신부는 합류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합류 지점을 어림잡고 힐라강 하류로 향했으나 그곳은 힐라 강이 아니고 콜로라도 강이었다.

안내인 도망간 후 단신 모하비 사막 종단
가르세 신부는 이곳에서 원주민 안내인을 고용하여 모하비 사막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모하비 부족에게 겁을 먹은 안내인은  도망쳤다. 가르세 신부는 단신 네바다주 경계에 이르렀다. 모하비 사막을 횡단하며 가르세 신부는 목숨을 건 탐험끝에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육상의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산하비에르 델 박 선교원에 돌아와 그간의 탐험을 소상히 기록한 후 바카레리 지사에게 제출했다. 1774년 디 안자 수비대장이 제1차  알타캘리포니아 탐험을 계획하자 바카레리 지사는 노선 안내자로 가르세 신부를 추천했다. 자기 주장이 강한 가르세 신부도 아파치와의 충돌을 피하자면 노선 변경이 우선이라는 사령관의 설득에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았다.

1774년 1월 8일 혹은 9일부터 2월 8일까지 (그레고리안 일력)

1월 8(9)일 첫 출발일 성공기원 미사 후 장도에 오르다
새벽 일찍부터 짐을 꾸리던 병사와 수행원들은 처음에는 짐 꾸리기가 서툴러  애를 먹었으나 점차 익숙해졌다. 디 안자는 병사와 수행원들의 동작을 세심히 지도하며 탐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준비가 갖추어지자 가톨릭 종교국가답게 안전하고 성공적인 탐험을 기원하는 미사에 전대원은 참석했다. 출발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디아즈 신부와 가르세 신부가 미사를 집전했다. 가르세 신부가 시작 기도를 바치고 디아즈 신부가 예수고난 십자가를 높이 들었다. 장중한 성가가 선교원을 울리는 가운데 미사가 끝났다. 디 안자는 마른 고기, 화약, 담배, 옥수수, 솥단지, 연장, 야영장비, 화기 등 탐험 중 필요한 화물이 노새 등에 안전하게 실렸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마침내 길게 줄지은 탐험대의 행렬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원주민 안내인 타라발 (Tarabal)을 따라 새벽 이슬을 털었다. 디 안자는 입을 굳게 닫은 가르세 신부와 나란히 말을 몰며 묵묵히 옆을 지켰다. 가르세 신부는 자신이 주장한 여행길이 아니어서인지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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