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박 60여 마일 산타리타 산 부근에서 첫 야영
탐험대는 투박에서 투산 쪽을 바라보고 약 10여 마일을 북상한 후 투산을 향해 북쪽으로 잡았다. 소노라 일대의 겨울 햇살은 짧았다. 디 안자 사령관은 산타리타 (Santa Rita) 산 (* 산타리타 산은 투산에서 남동쪽으로 40여 마일 지점에 위치. 북쪽에서 남쪽으로 26마일 가량 뻗어있다. 높이는 6,000피트로 투박에서는 약 60여 마일) 부근 작은 내가 흐르는 지점에서 대열을 멈췄다. 그리고 노새에 실린 짐을 모두 내려놓은 후 다시 실었다. 이처럼 전 대원에게 반복해서 짐을 싣고 내리는 훈련을 하는 동안 대원들은 어느정도 능숙하게 짐을 다룰 수 있었다. 비상시 개인이 소유한 짐을 얼마나 빨리 다루느냐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자 일행은 이곳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그 사이 너른 풀밭에 풀어놓은 말, 젓소 등 가축은 넉넉하게 풀을 뜯었다. 또한 시중을 들 원주민과 통역, 안내인은 모닥불 옆에서 추위를 달랬다. 이처럼 사소한 문제를 서로 풀어가면서 대원들사이는 서로 친숙해지고 유사시 살아남는 방안을 스스로 터득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디 안자는 가르세 신부를 비롯한 전 대원들에게 ‘왜 산가브리엘 선교원으로 가는 노선을 변경했는 지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디 안자는 가르세 신부가 제안한 노선이 현재의 노선보다 훨씬 단축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투박 북쪽에 진을 치고있는 아파치나 아직도 저항하는 일부 원주민때문에 노선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디 안자는 이곳만 피하면 아파치들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탐험중 부족한 말은 알타 (Alta)지방이나 스페인의 최변방 수비대가 있는 카보르카 (Caborca)나 인근 선교원에서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산가브리엘을 탈출해 사막을 헤맨 타라발이 길 안내
또한 디 안자는 1주일 전 산가브리엘 선교원을 탈출해 카보르카 사이를 지나온 바하캘리포니아 출신 세바스티안 타라발 (SebastianTarabal)의 생생한 기억을 믿었기 때문이다. 비록 반대편 노선이기는 하지만 타라발은 오늘의 멕시코 북부지역에서 로스앤젤레스 사이를 지나왔다. 바하캘리포니아 태생인 타라발은 그의 부인과 또다른 원주민과 함께 고향 바하캘리포니아로 돌아가려 산가브리엘 선교원을 탈출했다. 3인의 도망자는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위험한 사막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타라발의 부인과 동행자는 기아와 탈수로 사막에서 사망했다. 죽음직전 타라발은 유마 원주민에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유마 원주민 추장 살바도르 팔마 (Salvador Palma)는 타라발이 탈영자임을 직감했다. 팔마 추장은 스페인측의 환심을 사려 캘리포니아 만의 알타 (Alta)수비대에 가련한 도망자를 넘겼다. 도망자를 넘겨받은 신임 소노라 주지사는 산가브리엘에서 도망쳐온 길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타라발을 디 안자 탐험대의 길 안내로 내주었다. 타라발로부터 사막을 지나온 이야기를 들은 가르세 신부는 사막대신 콜로라도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 산루이스 오비포 (San Luis Obispo)로 향하는 방향을 잡는 것이 거친 사막을 지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같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모닥불은 점차 사위어가고 대원들은 텐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둘째날 774년 1월9일 일요일
기상한 대원들은 텐트를 접고 다시 짐을 꾸렸다. 짐을 쌓고 노새 등에 싣는 연습 덕분인지 대원들의 동작은 민첩했다. 식사 후 정각 8시 일행은 다시 길에 나섰다. ‘황제의 길’은 잘 다듬어서인지 편안했고 또 안전했다. 황제의 길을 가운데 두고 한편은 피마인들의 땅이고 반대편은 스페인 통치지역이었다. 서쪽은 피마인들의 땅인 피메리아 (Pimeria)의 말라버린 강바닥과 연이은 산자락에는 손바닥만한 경작지가 원주민들의 목숨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황제의 길은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서쪽으로 뻗어 북쪽에는 산하비에르와 남쪽의 카보르카가 있었다. 투산서부터 황제의 길은 산타크루즈 강과 나란히 지금의 소노라 벌판을 흘러 파하리토 (Pajarito)산맥을 건너 알타 (Alta) 강 계곡으로 흘러들었다. 황제의 길은 1769년 수비대가 들어선 몬트레이까지 연결되었다. 이곳이 마지막 스페인통치령이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알타캘리포니아와 뉴스페인의 사이에는 어떠환 행정조직도 갖지못했다. 실제 알타이내 지역은 인간이 정착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스페인 행정당국의 철저한 외면을 받아왔다. 실제 스페인측의 선교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몇몇 유럽인들이 모험삼아 살아보았지만 예수회가 세운 선교원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다. 디 안자 일행은 첫날 요새가 있고 몇몇 부락과 농경지가 보이는 곳을 지나 알타계곡까지 전진했다.
1774년 1월10일 월요일부터 12일 수요일까지
길 양편에 가파른 산이 보이는 언덕을 지났다. 이른 새벽 구름은 청명한 하늘에 새털처럼 흩어져 있었다. 21마일을 전진한 후 황제의 길에서 1마일 거리 물이 흐르는 곳에 야영장을 마련했다. 한밤중 내리던 빗방울이 밤새 눈으로 변했다. 온 산천이 밤새 하얀 담요를 덮은 듯 모든것이 하얗게 변했다. 날이 밝자 온 세상이 희미해졌다. 비와 눈이 교대로 내리는 이같은 날씨는 아구아 에스콘딜라 (Agua Escondida)에서 야영하는 이틀동안 계속되었다.
1774년 1월13일 목요일 (6일째)
날이 개이자 탐험대는 다시 전진했다. 탐험대는 작은 내를 따라 계곡을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1마일을 전진한 후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날은 쾌적해졌다. 오후 늦게 일행은 선교원이 있는 사릭 (Sarlc) 근방에 야영장을 차렸다. 주변에는 작은 내 두개가 합류하고 샘이 있어 주위 농경지는 인근 2천여 원주민을 먹여살릴만큼 너른 들판은 풍요로왔다. 그러나 인근에 아파치의 약탈이 빈번해지자 지금은 고작 40여 가구만이 살고있었다. 은괴소동으로 유명한 아리조나 (Arlzona) 목장은 북동쪽으로 24마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은괴소동이 났던 산자락은 아파치들의 공격이 두려워 아직까지 미개발상태라고 했다.
1774년 1월 17일 월요일부터 1월18일 화요일까지 (10일에서 11일째)
며칠째 날씨는 눈이 부시게 쾌청했다. 그러나 새벽녘은 유난히 컴컴하더니 끝내 비가 내렸다. 다행히 알타까지는 2마일거리였다. 디 안자는 이곳에 잠시 머문 후 여유있게 말을 더 보충하기로 했다. 일행은 강 하류를 따라 전진한 후 늦은 아침무렵, 오래 전 아리조나에서 목장을 운영하던 베르나르도 디 우레아가 사령관인 수비대에 도착했다. 우레아는 디 안자 사령관의 아버지가 생전 우레아의 목장에 머물면서 은괴소동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부자 2대가 우레아와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는 실한 말들을 구할 수 있고 또한 허약해진 말을 좋은 값에 거래할 수있었다. 우천으로 두번째 밤을 이곳에서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