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종교이다. 이스라엘의 종교에 기반을 둔 유대교는 주전 400년경 바빌론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지도자들 중 특히 랍비 에스라의 사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에스라의 사상은 모세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종교의 근간과 전현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모세적 이스라엘종교의 부흥의 성격을 갖는다. 상천하지에 오직 진정한 신은 야훼 엘로힘 한분 뿐이며 그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백성에게 부여한 계명에 순종할 때 의로움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은 그런 야훼 엘로힘 신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백성은 언약의 백성으로 야훼 엘로힘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준수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랍비 에스라의 부흥운동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주전 400년경의 에스라의 부흥운동은 후일 점점 경직화 되고 율법화하여 생명성을 상실한 유대교로 퇴락하게 된다. 여기서 모세적 이스라엘종교에로의 회귀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운동이며 복음운동이다. 그는 복음서에서 자신이 지상에 온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로 상징되는 율법과 선지서와 시가서로 구성된 구약성경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고 왔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은 새롭게 다시 살아나고 그 본래의 의미대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예수께서 천명한 이스라엘종교의 부흥은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야훼 엘로힘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그가 지은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됨이다.
로마제국 한 모퉁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근간을 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이 태동될 때 로마제국내에는 황제숭배와 더불어 온갖 다신론적 숭배문화가 창궐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산 중심 다신론은 이름만 바뀌어 로마제국내로 유입되었고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이시스종교, 동방 페르시아로부터 배화교와 마니교 등이 들어와 마치 종교백화점 같은 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다신론은 로마제국의 제반 시책에 아무런 갈등의 대상이 되지않았기에 로마제국은 시민들의 다신론적 종교행위를 문제삼지 않았다. 다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로마황제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 종교인 유대교와 예루살렘성전제사를 용인해 주는 선에서 상호타협을 맺었다. 문제는 유대교안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로마제국내 거점도시에 설립되고 교인들이 증가하면서 로마황제를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로 로마제국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 점이다.
주후 30년에서 60년까지는 기독교회가 대부분 유대인들가운데서 성장하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볼 때는 일종의 유대교 분파로서 인식하여 기독교회에 대한 감시나 견재가 없었다. 하지만 주후 60년이후 기독교회가 유대교와는 별도의 새로운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집중적으로 로마제국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기독교회가 로마황제를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견제요인이 되었다. 사실 로마제국에서 로마황제를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고백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모반의 행위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후 300년간 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회가 간헐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전면적인 박해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두개의 다른 일신론 즉 로마황제를 유일한 주님으로 믿는 신앙과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으로 믿는 또다른 신앙사이의 영적 대결의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그러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회가 승리하게 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한가지는 그 당시 로마제국은 다양한 다신론적 종교들은 많이 있었으나 그 당대 시민들의 영적 정신적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기독교도로 개종하게 되었고 변화된 기독교인들의 간증은 강력한 복음전파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은 그 시대 가장 강력하게 주변사회와 이웃들에게 구제와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관으로서 이것이 불신자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주후 4세기 초엽 막시무스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콘스탄틴은 로마제국내 대세가 이미 기독교에 있음을 간파하고 그의 정치적 후원세력으로서 기독교를 끌어들여 소위 ‘제3의 종교요 인종’이었던 불법종교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기독교적 일신론의 승리이며 이것이 중세 천년간 유럽이 기독교적 일신론의 세계관으로 순치되어가는 단초를 이루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