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이범용의 기업열전] 세계인의 청량 음료 코카콜라 이야기- 펨버튼 아들 코카콜라 명칭 사용을 거부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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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새벽 꽃망울을 터뜨린 풀꽃처럼 청초한 루시 “리지”는 언젠가부터 아사 캔들러에게 여인으로 다가왔다. 1859년 9월28일생의 어린  리지는 하루가 다르게 아사의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황금 빛깔의 긴 머리를 나풀대며 리지가 오갈 때마다 아사는 이유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은 벌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사는 아득한 시선으로 리지를 바라보며 ‘언젠가 내가 사장이 되면 리지를 아내로 맞아야지’하고 다짐했다. 한편 리지를 끔찍하게 귀히 여기는 약국주인 호워드는 다칠세라 리지 곁에 아무도 어른거리지 못하게 항상 사나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호워드는 아사보다  15살 나이가 더 많았다. 

리지도 이러한 아사의 눈길을 느꼈다. 그리고 성실하고 다부진 모습의 아사에게 호감이 갔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자연 호워드의 눈에  들어왔다. “감히 종업원주제에 내 딸을…”하고 불같이 노한 호워드는 단칼에 무를 자르듯 두 사람을 갈라놓기로 했다. 그리고 리지와 작은 딸 앨리스를 한데 묶어  수천리 머나먼 길 노스 캐롤라이나의 윈스톤 살렘에 있는 살렘 여학교로 보내버렸다.

아사와  헤어지게 리지를  타지역 학교로 보내

명문 사립 살렘여학교는 전교생이 고작 190명의 명문 사립학교였다. 조오지아 출신 학생은 리지와 앨리스를 포함하여12 명뿐이었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규율이 무척 엄했다. 학생들이 외부와 주고받는 서신은 하나하나 사감의 검열을 거쳐야했다. 호워드는 아사와 리지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기 위해 이같은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호워드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어찌되었는지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더   열이 올라 아사는 매일 행복했고 멀리 떨어진 리지로부터도 전혀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다. 호워드는 앨리스에게 리지를 엄중 감시하도록 당부했으나 앨리스도  별다른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1877년 4월, 마침 아사가 독립하여 자신의 약국에서  나가자 ‘잘되었다’고 생각한 호워드는 리지와 앨리스를  라그랜지학교로 옮겨버렸다. 라그랜지(La Grange)는 애틀란타에서 서남쪽로 62 마일 거리에 있는 한적한  동네로 라그랜지 학교는 1831년 문을 연 사립여학교였다. 살렘보다 한층 규율이 엄한 외딴 곳에 두 딸을  옮겨놓고 호워드는 안심하고 흐뭇해했다.  

리지 학교로 돌아가기 거부하고 결혼을 선언

1877년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게 되자 리즈와 앨리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호워드는 모처럼 집을 찾은 두딸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하고 즐겁운 성탄절을 보냈다. 방학이 끝나 리즈와 앨리스는 외지고 한적한 라그랜지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떠날 날이 되어도 리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않았다. 대신 리지는 호워드에게 다음달 1878년 1월15일 아사와 결혼하기로  했으니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호워드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리지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드디어 호워드는 리지의 결혼을 허락할 수도 없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뿐더러 아사를 사위로 인정하지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사와 리지는 1878년 1월15일 애틀란타 제1침례교회에서 목사 그윈(D.W.Gwin)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사의 옛 고향 빌라 리카로 신혼여행을 가서 아사의 옛 친구들과 마을 친지들에게  신혼 인사를 드리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리지 아버지 호워드 결혼식 참석 거부

애써 두 사람의 결혼을 외면하던 호워드는 12월 리지가 아기를 갖는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두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몇 날을 고민하던 호워드는 한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업원이었으나 지금은 어였한 약품 도매상의 사장이고 사위가 된 아사 캔들러에게 화해를 청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지 10개월 만인  11월24일 호워드는 “귀하에게, 본인은 이제 귀하에 대한 적의를 모두 버리고 귀하와 호의를 갖고 장차 친구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본인 의사에 동의하신다면 알려주시기바랍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12월2일 리지는 리지의 작은 아버지 골드스미스 병원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에게 아사와 리지는 아기의 외할아버지 호워드의 이름을  빌려 ‘챠알스 호워드 캔들러’라고 이름을 지었다. 챠알스는 일생 지신을 ‘호워드’ 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5년전 단돈 1달러75센트를 주머니에 넣고 직업을 찾아 거리를 전전하던 아사 캔들러는 이제 어엿한 사장에다 애틀란타 상류사회 인사인 호워드의 사위가 되고 한 아기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사는 그간 애틀란타에  부동산 붐이 일자 동업자 홀맨과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자산을 일구었다. 1881년 4년간 동업관계를 이루던  홀맨이 회사를 떠나자 아사는 홀맨의 전 지분을 인수했다. 그리고 1년여 후인 1882년 4월에는 장인인 호워드에게 자신의 지분 반을 양도하고 ‘호워드 캔들러’ 회사를 설립했다.

장인  호워드 아사에게 화해를 신청

약국에서 약품 조제나 거래만으로는 큰 돈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캔들러는 의약품 이외에 각종 상품을 취급했다. 또한 캔들러는 신약이 나올 경우 성공여부를 예의 주시하다가 성공할 기미가 보이는 신약은 따지지 않고 그 특허를 사들여 자신의 제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같은 방법으로 아사는 감기, 신장 및 피부질환 약품제조에 쓰이는 혈액제제 ‘보타닉 블러드 바암’, 향수 ‘에버라스팅 코론’, 타박상이나 상처 등에 특효인 ‘부크렌 아르니카 살브’, 감기 기침약 ‘킹스 디스커버리’, 치아표백제 ‘디-렉-타-라브’ 등 약품의  특허를 사들여 자신의 공장에서 제조한 뒤 도매상을 통해 전국으로 소화했다. 당시 애틀란타는 남부 일원에서 신약개발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아사는 성공할 기미가 보이는 코카콜라를 인수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펨버튼 아들 거래가격에 시비

애틀란타의 4월은 벌써 한 여름이었다. 더위와 함께 코카콜라같은 청량음료의 소비가 활발한 여름철이 다가오자 코카콜라의 지분 일부를 확보한 아사 캔들러는 워커와 함께 부지런히 소다 판매업자를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로빈슨은 콜라 시럽을 제조했다.

그러나 펨버튼의 아들 챠알리는 아사 캔들러와 워커에게 코카콜라 상표 사용을 반대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코카콜라 원액의 권리 일부만 팔았지 ‘코카콜라’라는 상품 이름은 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챠알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아사는 코카콜라라는 이름 대신 ‘욤욤(YUM YUM)’이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했으나 코카콜라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아사는 욤욤 대신 ‘코크(KOKE)’라고 이름 지어 시장에 내보냈으나 이것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애틀란타에는 1876년 뉴 햄프셔에서 나온 목시(MOXIE)라는 신경안정제 겸 청량음료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목시는 현재 일본의 기린 회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메인같은 동부 여러주에서 지금까지도 활발히 팔리고있다). 또한 메이필드, 머어피 등이 참여한 펨버튼 의약품 회사에는 챠알리가 펨버튼을 대신하여 코카콜라를 시장에 내놓아 아사의 욤욤이나 코크는 고객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사는 또한 챠알리로부터 “속았다”고  항의하는 편지를 여러차례 받았다. 챠알리는 아사에게 청량음료의 시장 형편을 보아 코카콜라 원액에 대한 권리를 550 달러로 거래한 것은 분명 기만이며 사기로 이 가격은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라고 항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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