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캔사스에서 일기시작한 노예제도 찬반논란은 불꽃처럼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1856년 링컨과 더글러스 간에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이자 워싱턴 정가도 온통 노예제도 찬반 논쟁에 휩쓸렸다. 프로이드 장관도 이제는 낙타 1,000 마리 수입 건이나 인디안과의 전투에 낙타를 투입 한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노예제도 찬반논란에 뒷전으로 밀린 낙타
뒷전으로 밀려난 텍사스 캠프 버어디의 낙타나 캘리포니아 테혼 요새의 낙타들은 텍사스 주둔군 사령관 트위그 장군의 끊임없는 불평에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낙타우리에서 빈둥거리며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 캠프 버어디의 낙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이따금 산 안토니오 요새에서 보리나 건초를 가득 싣고 우리로 돌아오는 일이 전부였다. 이처럼 한가한 낙타를 위해 빈튼 소령은 매월 낙타 총감독에게 45 달러, 그리고 매월 20 달러씩 4명의 몰이꾼에게 임금을 지불했다. 한편 캘리포니아 테혼 요새의 낙타들도 이따금 양식을 조달하러 LA시내를 찾았다.
한편 아리조나 35도선을 지나는 마차길 측량을 마친 비어얼은 워싱턴을 방문하여 측량 결과를 보고했다. 노예제도 찬반문제로 어수선한 워싱턴 정가는 즉시 비어얼에게 새로운 임무를 맡기지 못했다. 얼마 후 비어얼은 알칸사스의 스미스 요새에서 서쪽을 잇는 철로길 측량에 들어갔다. 코만치 인디안 혼혈로 전설적인 서부의 소몰이떼 안내인 제시 치솜과 델라웨어의 블랙 비버를 안내인으로 고용하고 비어얼은 캐나디안 강 줄기를 따라 서부 대평원을 거쳐 리오 그란데 까지 이르렀다.
인디안 공격받는 군수물자 운반 낙타
측량대가 휴대한 양식은 콜로라도 강 근방까지 버틸 수 있었다. 비어얼은 대원 한 사람을 엘 파소를 거쳐 캘리포니아의 테혼 요새로 보내 측량대의 부족한 식량은 콜로라도 강 근방까지 가져와 전달 해줄 것을 요청했다. 비어얼은 또한 35도선 마차길을 지날 때는 인디안의 습격에 대비하여 군의 호위를 받으라고 경고했다.
화물운송업자 비셥(A.K.Bishop)은 캘리포니아 군부대와 계약을 맺고 비어얼의 측량대에게 화물을 전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비어얼이 아끼던 하얀색 낙타 서이드를 탄 비셥은 군수품을 가득 실은 낙타와 개척민으로 짜여진 완전무장한 40여 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비어얼과 약속한 장소로 길을 나섰다. 낙타 몰이꾼 하이 졸리도 동행했다.
비셥과 운송대는 콜로라도 강 줄기를 따라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전진해 나아갔다. 사위는 거친 바위사이로 힘들게 자란 관목만이 초라하게 서있을 뿐 흐르는 강물소리조차 정지된 듯 괴기스럽게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고 하늘을 울리는 듯 인디안 전사들의 함성과 함께 비오듯 화살이 날아왔다. 비셥은 낙타와 일행을 길가 바위를 엄폐물 삼아 몸을 피신시켰다. 그리고 호위대와 함께 괴성을 지르며 쏟아져 내려오는 인디안들을 향해 총알을 날렸다. 지난 8월 이주 마차대가 이 근방에서 인디안에게 잔인하게 약탈당한 적이 있어 비셥일행을 호위하기로 했던 병사들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을 타고 달려오던 인디안들이 하나, 둘 두손을 쳐들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래도 화살은 바람소리를 가르며 호위대원들 발앞에 꽂혔다. 낙타들은 요란스런 총소리에도 미동도 않고 논만 껌벅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디안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화살과 몽둥이로는 총을 들고 있는 40명의 적수가 되지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일제히 퇴각했다. 비셥과 대원들은 소리를 지르며 승리를 환호했다.
인디안들을 물리친 비셥일행은 콜로라도 강을 건너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했다. 그리고 비교적 규모가 큰 인디안 마을을 점령한 후 마을에 머물렀다. 비셥은 일행을 반으로 나누어 20 명의 호위대는 LA로 돌려보내고6명의 대원은 마을에 남겨두고 14 명의 대원과 짐을 실은 낙타를 이끌고 비어얼과 만나기로 약속한 오늘날 프래그스태프 근방 레룩스 스프링으로 향했다.
35도선 마차길따라 동서로 우편물 배달
그러나 비셥 일행에게 참패를 당한 인디안들은 낙타에 가득 실은 물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디안들은 200여 명의 건장한 전사들을 골라 비셥 일행이 지날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는 비셥 일행을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도 활과 몽둥이로 무장한 인디안들은 용감한 개척민들의 적수가 되지못하고 많은 사상자만 어지럽게 남긴 후 모두 달아났다.
비어얼 일행이 식량을 전달받기로 한 레룩스 스프링에 도착했을 때 화물운송업자 비셥도 그리고 그들을 경호해야 할 군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일보다 며칠이 지나 요란한 낙타방울소리와 함께 비셥을 태운 하얀 색깔의 우람한 낙타 서이드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짐을 실은 낙타와 무장한 개척민들이 다가왔다. 그중에는 낙타를 탄 하이 졸리의 자랑스런 모습도 보였다. 비셥의 일행중에는 마침 캘리포니아로 우편물을 전하려고 콜로라도 강을 건너려던 배달부가 우연히 합류했다. 비어얼은 캘리포니아 행 우편물은 테혼 요새로 돌아가는 낙타 편에 그리고 비셥 일행이 가져온 동쪽으로 향하는 우편물은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일행에게 전달했다. 이후 비어얼은 1860년 4월19일 35도 선 마차길을 따라 우편물이 처음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배달되었다고 만족해했다.
비어얼은 대원들을 현지에 남겨두고 비셥과 낙타 3마리를 데리고 5월4일 추가 식량을 확보하기위해 테혼요새로 향했다. 그리고 추가식량을 낙타에 싣고 6월 16일 콜로라도 강을 건너 프래그스태프 근방에서 대원들과 합류한후 뉴 멕시코의 알부퀘키로 떠났다.
1859년 2월4일자로 캘리포니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부임한 클라크 (Newman S. Clarke)준장은 콜로라도 강 이남의 황무지에 산재한 군 요새에 군수품을 나르자면 낙타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클라크 장군은 병참감 제섭 장군에게 “남캘리포니아 테혼 요새에 있는 낙타를 이용하여 콜로라도 강 이남의 황무지에 군수품을 운송하게 하여달라”고 요청했다.
황무지 군요새에 낙타지원을 요청
클라크 장군의 요청은 9개월 만인 11월19일 제1용기병대의 병참장교 데이비드손 중위에게 배당되었다. 데이비드손 중위가 낙타를 인수하러 테혼 요새를 방문했을 때 낙타는 모두 28 마리가 있다고했다. 그러나 부족한 낙타 한마리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않았는지 낙타의 등은 온통 상처투성이고 제 때 먹지를 못한 낙타는 비쩍 여위어 있었다. 데이비드손 중위는 1859년 11월부터 1860년 1월까지 낙타의 사료인 보리와 건초값으로 한마리당 30 달러 씩 모두 1,583.88 달러를 지출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치자 놀란 낙타 15 마리가 달아났다. 데이비드손 중위와 낙타수색대는 멀리 산 버나디노 근방에서 9마리, 그리고 레익 엘리자베스 근방에서 나머지 6마리를 찾았다.
카멜 익스프레스, 모하비 사막을 달리다
당시 LA에서 모하비 사막을 잇는 300 마일을 지나자면 보통 16일에서 18일이 걸렸다. 수하물인 경우 LA 항구를 떠나 바하 캘리포니아를 거쳐 콜로라도 강 하구에서 하역한 화물이나 우편물은 다시 증기선에 실려 유마 요새로 배달되었다.
행코크라는 사나이는 1860년 ‘카멜 익스프레스’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LA를 지나 모하비 사막을 낙타를 이용하여 화물과 우편물을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배달하겠다고 나섰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시도해 보지않은 발상에 언론들은 떠들썩했다. 모하비 사막을 질주할 낙타 몰이꾼으로 행코크는 테혼 요새의 낙타 몰이군 ‘그리크 조오지’를 고용했다.
9월21일 많은 주민들이 나와 모하비 사막을 달릴 그리크 조오지와 낙타를 환송했다. 그러나 몰이군 조오지가 시간을 단축하려 낙타를 너무나 몰아부쳤던지 기진한 낙타는 사막을 다 건너지못하고 죽어버렸다. 당시 이 사건을 신문에서는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가던 사막의 배가 완주를 하지못하고 침몰했다”라고 보도하고 이어 “아무래도 화물을 운송하는 데는 노새를 따를 만 한 동물이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