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캘리포니아 테혼(테혼은 서반아어로 오소리) 요새의 낙타도 그 처지는 텍사스의 낙타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이제는 남부 연맹의 대통령이 된 제퍼슨 데이비스의 주도로 신대륙 미국에 발을 디딘 낙타는 데이비스 대신 북군의 증오대상이 되었다. 또한 노새나 말 목장주나 중개상들은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낙타를 견제했다. 텍사스 어느 마을은 아예 낙타의 도시 진입을 금하는 조례를 만들고 이를 위반했을때는 벌금이나 구류처분을 했다.
경매장에 내몰려 처분을 기다리는 낙타
테혼 요새에서 보호받던 낙타는 그간 모하비 요새나 산 페드로 요새, 그리고 서부 변방의 요새에 불려가 군수품이나 우편물 배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군당국이 제대로 낙타를 관리할 여력이 없자 낙타를 몰고 아리조나의 35 도선 마차 길을 개척한 비어얼은 워싱턴 당국에 낙타를 자신의 테혼 요새에서 관리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군당국이 낙타가 필요할 때는 데려다 사용하되 자연 증가한 낙타는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국은 남북전쟁으로 그의 제안을 검토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대로 LA 와 투산 간 우편행랑을 메고 사막을 달리던 낙타는 드디어 경매장에 끌려와 새주인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캘리포니아 주둔군 사령부 바빝 중령은 1863년 8월1일 테혼 요새에서 관리하는 36 마리의 낙타를 처분하자고 메이그 사령관에게 건의했다. 워싱턴 당국은 9월9일 메이그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캘리포니아 여러 곳에서 그런대로 요새와 요새사이 군수품이나 우편물을 나르던 낙타는 모두 샌프란시스코 근방 베네치아 바라크로 소집되었다. 산 페드로에 있던 낙타는 서부해안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이렇게 모여든 36마리의 낙타는 1864년 2월26일 커미션 2.5 퍼센트를 제한 1,945 달러를 제시한 맥로그린(Samuel McLaughlin)의 손에 넘어갔다. 바빝 중령으로부터 입찰결과를 보고 받은 메이그 장군은 만족했다. 메이그 장군은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타 36 마리를 모두 내다버려 경비를 절약할 심산이었다. 한 마리당 250 달러를 지불하고 웨인과 포터가 중동에서 사온 낙타는 이처럼 헐값에 처분되었다.
헐값에 처분된 낙타 네바다로 향하다
낙타 36 마리를 손에 넣은 맥로그린은 낙타를 몰고 한창 노다지 열풍이 불고 있는 네바다로 향했다. 낙타로 광물운송업을 벌여 한몫 잡을 심산이었다. 하이 졸리와 그리크 조오지는 맥로그린과 함께 낙타를 몰고 네바다로 향했다. 얼마후 맥로그린은 목장을 운영하는 릴리에게 낙타 3 마리를 팔았다. 릴리는 낙타를 서커스단에 팔 심산이었다.
네바다 컴스토크 광산에서 맥로그린의 낙타는 400 파운드 가량의 광물을 운반하는 중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노새나 말은 낙타가 접근만하면 발광했다. 낙타도 노새나 말을 본능적으로 기피했다. 맥로그린은 광부들로 부터 낙타를 근처에 접근시키지 말라고 몇 차례 경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낙타에게 총질까지 했다. 네바다를 떠나 맥로그린은 혹시나 낙타를 팔 수 있을까하고 아리조나의 유마요새로 향했다. 그러나 유마요새 근방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맥로그린은 갑자기 사망했다. 33 마리의 낙타를 졸지에 거두어야하는 하이졸리나 그리크 조오지는 어쩔 수 없이 33 마리의 낙타를 황야에 내다버렸다.
이렇게 버려진 낙타는 이후 황무지를 떠돌다 사냥꾼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항상 배고파하는 인디안들의 먹이가 되었다.
하이졸리와 그리크 조오지의 기구한 일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 땅에 남은 낙타 몰이꾼 하이졸리와 그리크 조오지의 인생은 낙타만큼이나 기구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리크 조오지는 낙타를 유마 근방 황야에 내다버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이 졸리와 헤어진 그리크 조오지는 흘러흘러 뉴멕시코까지 왔다. 그는 영어보다 서반아어가 더 편할 정도로 영어가 서툴렀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1866년 살인을 저지르고 외진 벌판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기록도 있다. 그리크 조오지는 1867년 캘리포니아로 흘러왔다. 이후 그는 미국 시민권을 받고 조오지 알렌으로 이름을 바꾼후 LA 헐리우드 근방 산타 모니카 거리에 아담한 흙벽돌 집을 짖고 “수염을 잘 다듬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 영어보다는 서반아 어가 더 편했던 그리크 조오지는 1913년 9월20일 캘리포니아의 몬테빌로 근방 미션 비호에서 사망, 위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이 졸리의 꿈은 노다지였다
포터에게 고용되어 1857년 신대륙 미국에 건너 온 하이 졸리의 일생은 정말로 기구했다. 1828년 시리아에서 태어난 하이 졸리는 실제 캘리포니아에서 불기시작한 노다지 소문을 듣고 신대륙을 찾았다. 노다지 꿈을 접지못한 하이 졸리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비어얼을 따라 아리조나의 마차길 개척에 나섰다. 이후 캐리포니아의 테혼 요새에서 낙타를 돌보면서 노다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낙타의 새주인 맥로그린이 아리조나의 유마요새 근방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자 하이 졸리는 돌보던 낙타를 들판에 풀어버린 후 남북전쟁시에는 유마요새에서 일했다. 1870년 다른 민간 고용자와 함께 요새에서 해고되자 하이 졸리는 요새 측에 자신은 정부당국에 의해 고용되어 중동에서 미국에 왔으니 해고하려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마 요새를 떠난 후 이리저리 떠돌던 하이 졸리는 1880년경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 이름도 테드로 (Philip Tedro)로 바꾼 후 투산 요새에서 일했다. 1885년부터 2년간 하이 졸리는 최후의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 소탕작전에 나선 조오지 크룩 장군의 수색대를 따라다녔다.
이후 투산에 정착한 하이 졸리는 늦은 나이에 게트루드 세르나라는 여인에게 청혼하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아멜리아와 헤르미나라는 두 딸을 두었다. 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는 “땅딸막한 체구에 키는 작고 피부는 약간 검은 편에 뭉툭한 코를 가졌다”고 그의 외모를 설명했다. 또한 그의 영어는 형편없어 차라리 서반아 어가 더 좋았다고 기억했다.
노다지 찾아 십여년 간 가족 을 떠나
그런대로 조용하게 지내던 하이 졸리에게 1889년 다시 노다지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그는 말리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노다지를 찾아 집을 떠났다. 하이 졸리는 군을 따라다니며 주의깊게 보아두었던 위켄버어그와 쿼츠사이트 사이에 통나무 집을 짖고 살았다. 그리고 황무지 벌판을 떠도는 낙타를 잡아 타고 이산 저산을 누비며 노다지를 찾았으나 행운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산을 뒤지기를 10여년,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는 하이 졸리는 가족이 있는 투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투산에 있는 부인과 장인 장모는 10여년 만에 빈손으로 돌아온 하이 졸리를 외면했다. 어쩔 수없이 하이졸리는 다시 쿼츠사이트의 통나무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딱하게 여긴 동네주민들은 그가 일생 군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을 감안하여 군 당국에 그의 연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군적에 등록된 적이 없어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간신히 목장과 광산에서 잡일을 거들며 연명하던 하이졸리는 1902년 12월16일 영면했다. 그의 묘지 앞에는 초라한 나무표시가 세워졌었으나 1935년 미국 고속도로 당국은 미국에 대한 그의 독특한 공헌을 기려 피라미드 조형물 상층부에 철제 낙타 조각품을 얹은 기념물을 세워 그를 기렸다. 한편 35도선을 따라 마차길을 개척한 비어얼을 기려 철도로 생긴 킹맨 도시 주민들도 낙타를 얹은 조형물을 세웠다.
포터와 함께 미국에 온 엘리아스라는 또 한 명의 몰이꾼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텍사스에서 뉴 멕시코를 거쳐 멕시코의 소노라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야퀴이 족 인디안 여인과 결혼한 후 목장을 경영했다. 그의 자녀중 한명인 깔레스(Plutarcho Elias Calles)는 1924~1928년 멕시코 대통령이 되었다. 어려서는 엘 투르코라고 불렸던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미국 남부지방에서 미국 육군의 낙타를 몬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회상했다.(Fowler,Camels to California,88,quotes an artcle by J.Marvin in the Frontier Times of 1941 to this effect.)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