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사막의 배’ 낙타, 아리조나 황야를 달리다(7) 낙타부대를 떠나는 웨인소령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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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6일 웨인 소령보다 한 발 앞서  왜곤 매스터 출신 알버트 레이는 낙타를 이끌고 캠프 버어디로 떠났다. 웨인 소령은 요새 내에 튼튼한 낙타우리를 신축하기 위해 인부 고용문제로 일행보다 하루를 더 지체한 후 떠나기로 했다. 

웨인 소령은 낙타가 인디아노라에 도착한 이후 알버트 레이와 낙타몰이꾼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노임을 지불했다. 1856년 5월 웨인이 지불한 월 급여액은 모두 140 달러. 웨인은 중동에서 고용한 아랍 낙타 몰이꾼 5명에게는 월 10 달러를 지급하고 왜곤 매스터 출신 알버트 레이에게는 65 달러, 그리고 통역에게는 25달러를 지급했다. 5월 웨인소령의 지급명세표는 다음과 같다.

알버트 레이(Albert Ray): 65 달러(총감독), 알렉산더 아스란얀(Alexander Aslanyan): 25 달러(통역), 마호메트 메리완(Mahomet Meriwan): 10 달러(낙타몰이꾼), 마호메트 이마르(Mahomet Imar): 10 달러(낙타 몰이꾼), 시람 아부 아그남(Sylam Abu Agnam): 10 달러(낙타몰이꾼), 알리 오글루 슬레이만(Ali Oglou Suleiman):10달러(낙타몰이꾼), 무스타파 오글루 하솜(Mustafa Oglou Hassom): 10 달러(낙타 몰이꾼) <5월 급여 총액:140달러>

중동 출신 낙타몰이꾼 월급은 10달러

그러나 웨인의 6월분 급여 총액은 60달러가 늘어나 200 달러가 되었다.  아랍인 낙타몰이꾼 중 슬레이만과 하솜이 월급을 올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웨인 소령은 두 사람에게만 10 달러씩 월급을 인상하여 월 20 달러를 지불했다. 그리고 월급여 20 달러에 현지인 백인 2명을 추가로 고용했다.

7월들어 웨인이 지급한 봉급명세표에는 또 변화가 생겼다. 아랍인 몰이꾼 마호멭 메리완과 마호멭 이마르가 낙타 사망에 책임을 지고 해고 되었다. 또한 지난달 고용했던 현지인 한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7월 말일자로, 그리고 다른 한명은 7월13일자로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 되었다. 그러나 낙타 사망의 책임을 지고 해고 되었던 두 아랍몰이꾼은 얼마 후 복직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은 타국에서 그대로 버려두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불쌍한 목숨’을 가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후 노새 몰이꾼이었던 현지인 4명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8월에 들어서는 고임금 52.40 달러에 프레데릭 윌리암 펠드스트맆이라는 사나이가 “카멜 매스터”라는 직함으로 채용되었다.

웨인은 캠프 버어디 요새 내에 중동지역에서 본 낙타우리 모양 그대로 낙타 우리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현지에는 저렴한 노동력을 포함하여 목재를 비롯한 석회석, 모래 등 건축자재가 풍부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웨인은 12월 준공예정인 낙타 우리를 높이 10 피트, 길이 150 피트에 벽은 흙벽돌과 돌, 목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그리고 우리 바로 뒤에는 아랍 몰이꾼을 위한 공동숙사도 마련하기로 했다.

영구 낙타우리 공사를 시작

웨인은 낙타우리 공사를위해 8월에는 노임으로 477.02 달러를 지불했다. 9월에는 석공과 목수에게는 월 50 달러 그리고 일당으로는1.50 달러, 그리고 일반 잡부에게는 월 20 달러를 지불했다. 웨인 소령이 애초 낙타를 구매하러 중동으로 떠날때 정부로 부터 2만 달러를 수령했으나 낙타를 구입하고 몰이꾼과 우리신축비를 지출하고도 그에게는 아직 9,920.77 달러가 남아있었다. 

9월 말 웨인은 데이비스 장관에게 그런대로 낙타들은 현지에 잘 적응하고 있으나 다만 쌍봉낙타 1마리와 스미르나에서 사온 낙타 4마리가 텍사스의 혹서에 괴로워한다고 보고했다.

낙타의 특성을 어느정도 아는 웨인소령은 낙타를 돌보는 병사들에게 낙타를 조심스레 다룰 것을 당부했다. 어느날 한 병사는 낙타가 불편해 할 만큼 많은 짐을 실었다. 낙타는 신음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그러자 병사는 낙타를 부리는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겠다며 전에 노새를 구박하듯 낙타의 배를 걷어찼다. 갑자기 배를 차인 낙타는 순간 긴 고개를 돌려 씹고 있던 냄새가 나는 건초 덩어리를 병사의 얼굴에 뱉어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병사는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낙타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재빨리 몽둥이를 피한 낙타는 날카로운 앞니로 병사의 팔을 물어버렸다. 다행히 병사는 팔의 뼈와 종지뼈가 부스러지지는 않았으나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낙타는 실제 자신을 학대한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앙갚음을 한다고 한다. 낙타는 기회를 노리다 자신을 학대한 사람을 발로 걷어차거나 육중한 몸으로 눌러 압사시킨다고 했다. 이같은 낙타의 습성을 아는 웨인 소령은 낙타와 불화가 있는 병사들은 되도록이면 낙타 주변에 어른거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차가 못가는 진흙 탕 길도 너끈히 걷는 낙타

10월1일 웨인 소령은 레이에게 12 마리의 낙타를 몰고 60 마일 거리의 산 안토니오에서 귀리와 같은 병사들의 양식을 운반해 오도록했다. 레이는 웨인으로부터 기존 루트를 사용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길이 너무나 희미해 방향을 잃어버렸다. 레이는 10마일 가량을 지나고서 길을 잘못들어선 것을 알았다. 웨인은 20 마일을 더 돌아 2일이나 늦게 산 안토니오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 안토니오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라면 짐을 실은 마차의 바퀴가 진흙에 빠져 도저히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길을 잘못들어 이틀을 허비한 레이는 빗줄기를 뚫고 떠나기로했다. 325 파운드의 짐을 실은 낙타 12 마리는 10월5일 일요일 정오 캠프 버어디를 향해 출발했다. 장대같은 텍사스의 빗줄기로 낙타가  지나는 황야는 온통 진흙밭이 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 속에서 순하디 순한 낙타들은 묵묵히 빗줄기를 헤치며 길을 걸었다. 만약 마차라면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비는 출발이래 월요일, 화요일 계속 내렸다. 12 마리의 낙타는 7일 밤 늦게 캠프 버어디에 병사들의 양식 3,800 파운드를 무사히 운반했다. 이번 여행에 참가한 12 마리의 낙타가운데 쌍봉 낙타 1 마리가 이가 아프고 다른 낙타 1 마리가 어떤 동물에 물린 것을 제외하면 모두가 건강했다. 

웨인 소령이 낙타를 조심스레 다루어도 각종 사고로 낙타가 죽었다. ‘구서프’라고 웨인이 부르던 쌍봉낙타는 평소 건강했으나 갑자기 죽었다. 부검결과 간과 낭종이 온통 고름으로 차있었다. 웨인은 아마도 장시간 결박된 채 배에 실려 온데다 낯선 땅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병이든 것 같다고 데이비스 장관에게 보고했다.

서른네 마리 중  스물아홉 마리만 살아남아

외상으로 낙타 한마리가 또 사망했다. 10월5일 에집트의 태수가 미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선물한 이 낙타는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몰이꾼 마호메트에게 물렸다. 이후 조심스레 치료받던 이 낙타는 상처가 덧나 11월 17일 죽었다. 상처부위에서는 반 갤론의 고름이 나왔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34 마리의 낙타중 쌍봉낙타 2 마리는 병으로 그리고 2마리는 부상으로 또 한마리는 간질로 죽어 모두 29 마리만 캠프 버어디의 우리에 남았다.

1856년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부캐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 더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웨인 소령은 그간 겪어본 낙타에 대한 제반 소견을 작성하여 12월 4일 데이비스 국방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 편지를 받아본 데이비스 장관은 12월13일자 편지에서 웨인 소령에게 워싱톤을 방문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웨인 소령은 캠프 버어디에서 낙타부대를 지휘하고 싶었으나 요새 내 기마부대원들은 그의 연임을 방해했다. 이제 캠프 버어디 내의 낙타 부대 공사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 웨인 소령은 워싱톤 방문길에 제2차 낙타 수송선이 도착 예정인 미시시피 강 하구 뉴올 근방의 크레센트 시를 방문하여 포어터 소령 일행을 격려하려했으나 인디아노라에서 회의와 일정이 겹쳐 포기했다. 대신 웨인소령은 데이비스 장관을 만나 후임으로 낙타에 대한 이해가 깊은 파아머 대위를 추천했다. 캠프 버어디로 돌아온 웨인 소령은 부대내 종사자들에 대한 1856년 12월분 급여를 지불하고 미진한 업무를 모두 마무리했다. 그리고 1월 19일 그간 정들었던 낙타와 텍사스의 대평원에 진한 눈길을 주고는 워싱톤으로 향했다.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다시 인디아노라를 방문한 웨인 소령은 반 보케렌 대위에게 곧 도착할 낙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남북 전쟁이 미 대륙을 휩쓸자 낙타를 다루던 주인공들도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갔다. 낙타부대 창설에 앞장섰던 제퍼슨 데이비스(1808.6.3~1889.12.6) 장관은 이후 남군의 대통령으로 1865년 5월19일 포로가 되어 2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또한 웨인 소령은 남군의 준장으로 북군과 전투를 벌였다. 포어터 중위는  이후 북군의 해군제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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