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유형지 바스크 레돈도로 가는 나바호 족의 ‘멀고도 먼 길’ – 페코스 강변에 섬너요새를 세우다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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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스 강변 일대를 돌아본 도드(Dodd)중령을 비롯한 장교단 일행은  칼튼 장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섬너 요새가 들어설 보스코 레돈도는 지대가 높아 비교적 홍수에 안전할 뿐만아니라  사방 2-3마일을 훤히 조망할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용수와 목재를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근처에 말먹이를 조달할 수있는 좋은 평원이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고 했다.

그러나 도드 중령은 이곳은 “보급창이 있는 유니온 요새와는 거리가 너무 멀고 근처에 있는 목초지는 말먹이용으로 충분하지 않아 만약 외지에서 구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한 보스크 레돈도라는 곳이 너무 외지기 때문에 “막사등 부속 건물을 지으려면 건축자재 운송이 힘들고 페코스 강물은 무기질이 너무 많아 식용수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않다.또한  봄철 홍수에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했다. 

조사단의 반대에도 보스크 레돈도로 선정

도드 중령 등 장교단은 섬너 요새를 신축할 경우 페코스 강변 보다는 아구아 네글레와 페코스 강의 합류지점은 건축자재와 화목 구입이 용이하고 식용수가 풍부할 뿐만아니라 근방에 너른 목초지가 있고  홍수에대한 안전하다는등의 이유로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칼튼 장군은 전략적 장점을 들어 산타 페에서 165 마일 거리의 보스크 레돈도를 강력 주장했다. 칼튼 장군은 우선 산타 페 인근 산에서 발원한 페코스 강물은 요새내의 병사와 요새에 수용될 인디안들이 사용하기에 넉넉하다고 보았다.거의 직사각형 모양의 보스크 레돈도는 서쪽으로는 페코스 강이 유유히 흘러 말썽많은 인디안들을 수용할 섬너 요새가 들어서기에는 알맞다고 보았다.또한 동쪽과 서쪽으로 얕으막하고 길게 뻗은 메사는 스테이크드 평원으로 잦아들었다.또한 서쪽과 북쪽은 수마일에 걸쳐 확트인 평원이 펼쳐져있어 약 50 마일을 달려야 촌락이 나타날 정도였다. 실제 코만치와 키오와 인디안들이 모여 뉴 멕시코로 약탈하러 가던 길목인 보스크 레돈도에 섬너 요새가 들어서면 메스칼레오 아파치나 산속에 숨어사는 인디안들까지 멕시코로 약탈하러 다니던 길목을  막아버리게되어 그만큼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칼튼 장군을 비롯한 뉴 멕시코 지역 사령부의 장교들과 워싱턴 군 당국자및 뉴 멕시코의 유력 정치인들은 나바호 영토내에는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있다고 믿고있었다. 뉴 멕시코의 신임 지사 코넬리(Henry Connelly)는 엄청난 보화와 백인들의 소나 양떼가 자랄 목초지를 깔고 앉은 나바호들을 보호구역에서 몰아내야한다고 혈안이되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땅을 나바호가 점령

칼튼 장군의 나바호 족 이주 계획에는 사업가들을 비롯하여 뉴 멕시코의 정치꾼도 한몫을 했다. 당시 35도선을 따라 철도를 부설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이곳에서 발생하는 자원을  동부와 서부가 교환한다면 나바호 족을 강제 이주하는데 발생하는 비용은 문제가 되지않는다고 보았다.

칼튼 장군과 일부 변방의 정치가들은 또한 나바호들을 일정한 장소로 이주시켜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그리고 평화롭게 사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친다면 어린이들이 이후 문명인이 된 부족의 중심이 되어 백인과 어울려살 수 있다고 믿었다.그리고 이런 나바호는 선대들의 약탈과 살인같은 옛 풍습을 희미하게나마 회상조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칼튼 장군의 대부대가 막강한 힘으로 자신들을 점점 조여오자 메스칼레오 아파치들은 백인들과 협상을 통해 난관을 피해보려했다.칼튼과 달리 칼슨은 아파치들에게 약간은 유화적이었다.그의 주선으로 아파치 부족장 몇명이 칼튼을 찾아나섰다. 

화평을 청하러가다 피살된 부족장

“그는 병사들을 산으로 진군시키기는 했지만 통화선을 열어놓았다. 늦가을에는 다섯 명의 추장이 산타 페를 방문해 칼튼 장군과 협상을 가지도록 주선했다.산타 페로 가는 도중에 추장 두 사람과 호위대는 전에 술집 주인이었던 제임스 패디 그레이던 대위가 지휘하는 분견대를 만났다. 그레이던은 그들에게 먼길을 가는 동안 먹도록 밀가루와 쇠고기를 주면서 대단한 호의를 보이는 척했다.잠시 후 갤리너 스프링스 근처에서 그레이던의 척후대는 그들을 다시 만났다.그들 중 아무도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않다.백인 지휘관인 아서 모리슨 소령은 짤막한 보고를 했다.”

“아주 기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는 그레이던 대위가 자행한 짓이었다. …내가 알 수있는 바로는 ,그는 이 인디언들을 완전히 속였다. 인디안 마을로 가서 술을 주고는 그 직후에 그들을 사살해버렸다. 물룬 인디안들은 그가 우호적인 의도로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밀가루, 쇠고기, 식량을 주었기 때문이다.”

남은 세명의 추장 카데트, 차토, 그리고 에스트렐라는 산타 페에 도착하자 칼튼 장군에게 그들 부족민이 백인과 화평하게 지내고 다만 산 속에 머물 수 있기만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튼은 거만스럽게 화평을 유지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페코스강 연안에 마련된 보스코 렌돈도로 가는 일이라고했다.(“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 디 브라운 지음, 최준식 옮김에서 인용)

나바호에 앞서 아파치 4백명을 먼저 유배

칼튼 장군은 1863년 4월부터 섬너 요새로 아파치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아리조나 지역사령관 칼슨 대령과 콜로라도 민병대가 벌린 대대적인 소탕전에서 백기를 들고 투항한 아파치 4백여명을 차례로 보스크 레돈도에 마련한 섬너 요새로 강제 이주시켰다.칼튼 장군은 요새에 수용된 아파치들에게 프에블로 인디안들처럼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법을 가르쳐 이들을 문명인으로 탈바꿈시키려했다. 이처럼 아파치들이 강제 이주되면서 누대에 걸쳐 메스칼레오 아파치들의 본거장이었던 리오그란디와 페코스 강변의 비옥한 땅은 이제 백인들의 땅이 되었다. 

메스칼레로 아파치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칼튼 장군은 이제 더 세력이 강한 나바호들을 몰아낼 계획을 차분하게 펼쳐나갔다. 우선 나바호들과 펼칠 대규모 전투를 위해 뉴 멕시코의 코넬리 지사 의붓 아들이며 웨스트 대령이 지휘하는 아리조나지역 사령부의 제2인자인 차베즈 (Jose Francisco Chavez) 중령에게 새로 모병한 뉴 멕시코 제4 기마소총대의 병사를 이끌고 오호 델 갈로의 주니(Zuni)산  근방 동쪽 산등성이에  요새를 신축하도록 명령했다.

차베즈 중령은 병참 장교 벤자민 스티븐스 중위와 함께 1863년 봄부터 목공을 비롯하여 기계설치공 등 민간인 기술자 25명과 사병 75명을 지휘하여 요새를 신축했다.차 베즈는 옛 폰틀로이 요새에서 막사를 비롯한 부속 건물을 철거하여 25만 피트에 달하는 목재를 조달하는가하면 민간업자로부터 38만장의 벽돌을 공급받아 장교및 사병 막사를 비롯하여 보급창고,병원등 건물이 들어선 요새를 짔고 윈게이트(Wingate)요새라고 이름 지었다. 

요새를 세우고 납호 정벌을 준비

나바호 영토 깊숙한 곳에 요새가 들어서고 사촌 격인 메스칼레오 아파치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백인 병사들에게 잡혀가자 나바호들은 다시 한 번 백인대장 칼튼에게 생명을 구걸하기로했다. 부족장 델가디토와 바르본시토는 12월 18명의 부족장들과 함께 산타 페에 있는 칼튼 장군을 찾았다. 이들은 그간의 잘못을 빌고 산 속에서만이라도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칼튼 장군은 약속을 깨는 나바호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 더 이상 평화조약은 없다고 매정하게 거절했다. 부족장들은 1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맥없이 돌아와 앞으로 닥칠 엄청난 재앙을 기다려만했다. 

1863년 4월11일 칼튼 장군은 칼슨 대령에게 우수한 유타족 정찰병 10명과 뉴 멕시칸 정찰병 4명을 알부퀴에서 차출하여 계속해서 나바호들의 동정을 살피도록했다. 3일 후 윈게이트 요새를 시찰한 칼튼 장군은 나바호들과의 일전을 위해 나바호 영토 내에 또 다른 요새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6월15일 칼튼의 명령에 따라 프에블로 콜로라도로 오늘날의 아리조나 켄-리 치 근방에 캔비 대령의 이름을 딴 캔비 요새를 세우기로 했으나 보급로와 목초지등의 문제로 대신 보니토 캐넌의 디화이언스 요새를 보수하여 나바호 정벌 보급창겸 작전본부로 사용하기로했다.대신 윈게이트 요새에는 제1 뉴 멕시코 민병대의 E, F 및 H 중대의 315명 병사가 보충되어 칼슨 대령의 작전을 지원하여 최소 2개중대는 교대로 항상 납호 영내에서 전투에 대비하도록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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