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유형지 바스크 레돈도로 가는 나바호 족의 ‘멀고도 먼 길’ – 전사대장 마뉴엘리토 드디어 투항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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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이 되자 옥수수 알은 노랗게 익어갔다. 풍년을 약속했던 옥수수 알을 먹어치운 야도충은 옥수수 알이 점점 굵어가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도 나바호들도 뜨거운 태양에 날로 영글어가는 옥수수를 바라보며 마냥 기뻐했다. 그러나 어느 날 옥수수 알을 살피던  병사는 옥수수 알에 야도충 애벌레가 슬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소식에 요새는 발칵 뒤집혔다. 놀란 병사들이 옥수수밭으로 달려가고 나바호들도 옥수수 밭으로 뛰어갔다. 병사들을 포함하여 나바호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야도충 박멸에 나섰으나 이미 번진 야도충에 옥수수는 맥없이 쓰러졌다.

한숨과 낙담 속에 수확이 끝났다. 옥수수는 예상치의 반도 되지않는 고작 423 ,582 파운드,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파종했던 밀도34,113파운드 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호박도 30,403 파운드, 콩은 3,500 파운드로 모두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자급자족의 꿈이 어긋나자 나바호들은 다시 병사들이 수령을 거부하여 폐기처분을 기다리던 부식에 의지하게 되었다.


야도충에 다시 망쳐버린 옥수수 농사 

섬너 요새에 다시 흉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칼튼 장군과 섬너 요새에 수용된 8,000여 명의 나바호들은 언론의 눈총을 받게되었다. 워싱턴과 뉴 멕시코 정가는 섬너 요새의 나바호 수용소를 폐쇄하자는 측과 그대로 두자는 측이 날카롭게 맞섰다. 남북 전쟁중 방치되었던 인디안 문제가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섬너 요새의 나바호는 워싱턴 정가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1865년 3월3일 상.하 양원은 합동으로 전 미국에 퍼져있는 인디안들의 실상을 조사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위원회의 의장은 부통령으로 하고 조사할 지역에 따라 3개 소위원회를 두었다.  

뉴 멕시코 지역을 담당한  두리틀( James R. Doolittle)상원의원과 3명의 조사단은 1865년 7월4일 나바호가 강제 수용된 보스크 레돈도의 섬너 요새에 도착했다.

조사단은 섬너 요새에서 병사들의 감시를 받아가며 영양결핍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8,000여 명의 나바호들의 참상을 보고 놀랐다. 또한 무기질이 많아 식용수로 적합하지 않은 페코스 강물을 마시고 설사나 이질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나바호들도 보았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친 흉작은 알카리성 토질이 주 원인임을 밝혔다. 조사단은 또한 거의 바닥을 드러낸 양식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조사단은 정부가 나바호들을 집단수용하여 문명인으로 개조시키려하나 이문제는 나바호들이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포기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요새에 조사단 파견을 요구  

워싱턴에 돌아온 두리틀과 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보스크 레돈도에 수용된 나바호들의 비참한 현실을 밝히고 내무성에 이를 철저히 조사하여 시정할 것을 권했다. 인디안 관리국으로부터 보스크 레돈도의 조사관으로 선임된 그레이브스(Julius K. Graves)는 1865년 12월31일 섬너 요새에 도착했다.

그레이브스는 나바호 부족장들을 모아놓고 면담을 가졌다. 하루 7, 8 시간씩 계속된 면담을 통해 그레이브스는 이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빼앗긴채 300-400 마일을 끌려온 이야기, 양식이 모자라 굶주린채 수로를 파고 황무지를 개간하다 영양실조와 풍토병으로 죽어간 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레이브스가 면담한 나바호 부족장들은 면담 내내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절제된 태도로 “자신들의 소망은 오직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밝히고 “붉은 바위틈에 지은  초막으로 돌아가 다시는 어긋난 행동을 하지않고 양이나 소를 키우고 옥수수를 기르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부족장들은 또한 그간 자신들이 살아온 생활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성하고 앞으로는 옳바르게 처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요새 폐쇄 주창자 인디안 총감독관에 임명

칼튼의 나바호 정책을 앞장서서 반대하던 스텍이 1865년 5월1일 사임하자 그의 남은 임기는 델가디토가 채우고 1866년 2월7일 노어턴(A.Baldwin Norton)이 인디안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임 총감독관 노어턴은 스텍의 나바호 정책에 따라 섬너 요새의 나바호 강제수용소는 폐쇄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땅은 차고 페코스 강물은 검다”라는 조사관들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이곳에서 추수한 곡식으로 나바호들을 자급자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앤드르 존슨 대통령은 남북 전쟁의 영웅인 예비역 대령 도드(Theodore H. Dodd)를 공석중인 나바호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도드는 두리틀 조사단과 함께 섬너 요새로 향했다. 매사에 정력적인 도드는 출발 직전 의회로부터 특별자금을 확보한 후 개간에 필요한 각종 농기구와 나바호들에게 입힐 의류를 세인트 루이스에서 구입했다. 그가 구입한 자재는 무려 황소 50마리가 끌고갈 만큼 많았다.

알카리성 토질과  해충으로 다시  흉작 

요새에 도착한 도드는 우선 냄새가 나는 흙벽돌 집을 사무실 겸 숙소로 삼았다. 그를 따르는 나바호들과 함께 새로 3마일에 달하는 수로를 마련하고 2,500 에이커의 농지를 새로 개간했다. 그리고 그곳에 옥수수를 심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도드는 고작 옥수수 3,000부셀을 수확했다. 도드는 한 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았다. 도드는 농사에 경험이 많은 나이가 지긋한 나바호들에게 1,500-2,000 에이커의 농지를 배분하고 자의로 농사를 짓게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로 실패였다. 보스크 레돈도의 알카리성 토질에서는 농사가 되지않는다는 것을 나바호 대리인 도드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죽기로 투항을 거부하는 전사 대장 마뉴엘리토 

1864년 12월 8,354명이던 섬너 요새의 나바호는 1865년 3월에는 무려 9,022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나바호들이 투항을 거부하고 백인병사들의 추적을 피해 새로운 은신처로 피해다녔다.

나바호 전사대장 마뉴엘리토는 세이 협곡이 백인들에게 점령당하자 부족들과 함께 살해당하지 않은 가축을 몰고 몸을 피했다. 붉은 바위를 감돌아 협곡을 달리는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눈발을 헤치며 마뉴엘리토는 자신을 따르는 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 강 지류 북쪽으로 향했다. 우선 추적하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너른 협곡에 심었던 옥수수, 밀등 겨울양식이 모두 불타버려 가지고 떠날 양식도 없었다. 

마뉴엘리토는 우선 콜로라도 강과 산후안 강 주변에 자리잡고 근근이 백인 병사들의 눈길을 피해가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를 따르던 많은 부족원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그의 곁을 떠났으나 마뉴엘리토는 같은 전사대장인 바르본시토와 선을 대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투항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마뉴엘리토와 마찬가지로 많은 나바호들이 백인들을 피해 그랜드 캐년과 나바호 산같은 깊은 산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느 지파는 백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치리카후아 아파치족에게 몸을 의탁하는가하면 케이엔타 지파는 나바호 산 후미 백인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냇물을 발견하고 아예 정착했다. 이곳에는 대략 1,000-2,000여 명의 나바호들이 백인들의 추적을 끝까지 피했다. 

한편 오늘날의 뉴 멕시코 고속도로 1번과 1-40번의 남동쪽 시마론 메사에 있는 아파치족에게 몸을 의탁했던 나바호들은 크룩 (Gen.Crook)장군의 병사들에게 쫒겨 다시 뉴 멕시코의 막다레나 북서쪽의 알라모 스프링스에  자리 잡았다. 이부족은 나바호족의 알라모 지파로 불리운다.

멀리 달아나 알라모 지파를 이룬 나바호족 

마뉴엘리토는 부족들과 함께 풀뿌리를 캐어먹으며 버텼다. 그러나 엄청난 추위를 겪으면서 그를 따르는 부족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1865년 2월 “봄이 오기전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끝까지 추적하여 부족들과 함께 모두 몰살하겠다”는 칼튼 장군의 경고를 어느 부족장이 가져왔다. 마뉴엘리토는 그 부족장에게 “이곳은 나의 땅이다. 내땅에서 나는 떠나지않고 내땅에서 죽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투항을 거부했다.

칼튼 장군은 나바호 부족내에서 마뉴엘리토의 비중으로 보아 그를 투항을 시키거나 생포해야만 나바호족 원정은 마무리된다고 보았다. 칼튼은 다시 에레로 그란데, 아르미호등 부족장 5명을 마뉴엘리토가 자주 찾는 쥬니 교역소 근방으로 보내 마뉴엘리토를 설득하도록했다. 마뉴엘리토는 옛 전우들을 자신의 은신처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바짝 마른 양 몇마리와 헐벗은 부족 100여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투항을 권하는 옛 전우들의 권고에 망설이던 마뉴엘리토는 결국 이를 거부했다. 이를 보고받은 칼튼 장군은 부하들에게 “그자를 당장 생포하거나 사살하라. 그를 사살하는 것만이 그를 따라다니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병사들이 그의 은신처를 덮쳤을 때 그는 벌써 바람처럼 사라진 후였다.

1866년 9워1일 며칠을 굶었는지 뼈만 앙상항하게 남은 마뉴엘리토가 윈게이트 요새에 나타났다. 제대로 걷지못하고  어기적대는 전사 23명이 그를 따랐다. 마뉴엘리토는 팔을 다쳤는지 한 팔은 허리 옆으로 늘어뜨리고 손에는 활과  화살도 없었다. 무기를 갖고 그를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칼튼 장군에 맞서던 나바호의 전사 대장 마뉴엘리토는 두손을 들었다. 얼마후 너른 황무지를 주름잡던 전사대장 마뉴엘리토는 한갖 처량한 포로 신세가 되어 머나먼    300마일 길 저편 페코스 강물이 흐르는 보스크 레돈도로 유배되었다. 마뉴엘리토와 함께 죽음으로 투항을 거부하던  바르본시토 전사대장도 얼마후 윈게이트요새를 찾아  투항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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