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은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다. 속임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심한 배신감을 주고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아내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했다가 몽땅 투자금을 날린 후 아내와 심하게 다툰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감쪽같이 나를 속일 수 있어요?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이제 우리 헤어져요”라는 말을 남기고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두문불출하고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속임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고 남들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다. 경쟁에 밀려 남들에게 뒤쳐졌다고 생각하여 낙오자가 되기 전에 남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로또에 당첨되는 허황된 꿈을 꾸며 남을 속이거나 배신하는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게 된다. 그렇게해야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진실을 은폐하는 세상에서는 정의가 설 자리가 없다. 이삭과 야곱이 살던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급변하고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도덕성과 정의 그리고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과 사랑은 오히려 퇴보하고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성경은 결코 거짓과 속임을 정당화하거나 허용하지 않는다. 창세기에는 속임이 키워드로 등장하지만 속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을 속이는 자는 속임을 당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 염소와 옷으로 이삭을 속인 야곱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염소의 피를 적신 그의 옷을 보고 유다에게 속았다. 다시 유다는 염소를 주기로 약속하고 창녀로 변장한 다말에게 속았다. 그러나 당시 속임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피해자나 힘없는 약자의 경우가 그렇다. 유다와 다말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엘이다말과 결혼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목전에 악하므로 죽임을 당했다. 유다는 관습에 따라 둘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었지만 자식을 갖기를 거부한 그도 죽음을 당했다.아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유다는 하나 남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기를 거부했다.
유다는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기다리면 나중에 전화나 카톡으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연락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그녀가 제 풀에 꺾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녀는 창녀로 변장하여 속임을 주무기로 유다를 공격했다. 그는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 그녀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아들을 얻게 되었다. 다말은 그에게 참된 인간의 길과 가장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불의가 다말의 잘못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창37장에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들의 리더로 급부상한 유다는 38장에서 가면을 벗고 자신의 문제를 깊이 인식했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속임수였다. 수직적인 계급사회에서 힘없는 사람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 남을 속이는 행위는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된 행위이지만 당시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사용한 속임은 오히려 샬롬의 회복을 가져왔다.
창세기 27장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100세가 된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시력이 약해졌을 뿐아니라 향후 집안을 이끌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그에게 없음을 암시한다. 그의 앞을 보지못하는 상태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는 조용히 에서를 불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먹게하여 내가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공개적으로 하기보다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다. 리브가나 야곱이 반발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거룩한 영성보다 먹는 즐거움을 원하는 자신의 욕망이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축복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랔 (Barach)인데 여기에는 무릎을 꿇는다는 뜻이 있다. 왜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까? 축복은 강함대신 무릎을 꿇고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인정할 때 주어지는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