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만들고 도망했다. 예루살렘은 해발 2700피트에 위치하고 여리고는 마이너스 800피트에 위치하여 무려 3500피트나 차이가 나는 매우 가파른 곳이며 17마일의 거리가 되는 험한 산길이다. 이 지역은 강도가 들끓는 위험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쓰러진 사람을 보고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갔다. 그들은 교회 목사와 장로급에 해당하며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왜 그냥 지나쳤을까?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이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냥 지나갔다고 해서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만큼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 몰라도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나에게 있는가? 아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어서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갔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고 상종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이고 변절자고 배신자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마리아 인은 그 쓰러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호텔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호텔 주인에게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라고 부탁하고 돈이 더 필요하면 돌아올 때 들러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쓰러진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거나 메모지에 자기 연락처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그에겐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하든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긍휼함과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않는다고 무시했지만 정작 그들은 죽어가는 생명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보자.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나 장로, 친구, 형제들이 다 얼굴을 돌리고 그대로 지나쳤다. 아마 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했다면 이미 죽었을 지 모른다. 그런데 당신이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겠다며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이 당신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면 누가 당신의 이웃인가? 이웃의 경계선은 없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이고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레미제라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은 가석방되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은 그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그는 우연히 자비를 베푼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경찰에 체포되지만 미리엘 주교는 은식기가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말하고 은촛대까지 챙겨 주었다. 미리엘 주교에게 장발장은 만난 적도 없고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이다. 그러나 그가 타인에게 베푼 용서와 사랑의 힘이 장발장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사람이 되게 했다. 만약 미리엘 주교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그를 대했다면 그는 영원히 어두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예수안에서 타인의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은 없다. 남이 죽던 말던 무시해도 좋은 사람도 없다. 야고보서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으로 인정하는 종교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고아와 과부를 고난 중에 돌보는 것이 진짜 종교이다. 따라서 타인을 나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돌보지 않는 것이 가짜 종교이고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짜 크리스천이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그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 “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