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뭐라고 해도 롯은 그의 혈연이고 피를 나눈 형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겁하게 그가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벌떡 일어서서 롯을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어깨동무를 하고 포도주 잔을 부딪히며 한 형제임을 선언했던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내가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 반문하며 형제를 버린 가인과 달리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하지만 그는 애굽에 내려가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슬며시 아내를 내어주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았던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무경험자를 전쟁터에 보냈더니 떨어지는 포탄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못해 무기와 장비 그리고 심지어 입었던 옷마저 버리고 황급하게 도주한 러시아 군인처럼 아브라함이 제대로 싸울수 있을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브라함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더이상 남의 땅에 얹혀사는 이방인이 아니고 이리저리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땅을 지키고 형제를 구하기위해 용감한 전사와 왕을 자처하고 나섰다. “자기가 특공대원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먹을 휘두르며 뒷골목에서 놀아본 사람도 아닌데 울분에 찬 감정과 혈기만 앞세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체 뭘 믿고 큰소리치는 줄 모르지만 저러다가 총알 한방 맞고 쓰러지면 개죽음이여! 남은 가족들을 생각 해야지. 거기 누구 없소? 누가 좀 말려.”하고 사람들은 쑥덕거렸지만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그는 단호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롯을 구했다는 표현에 히브리어 “헤이쉽(Heishib)”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슙(Shub)”에서 온 사역동사로 돌이키게 하다. 다시 가져오다, 회복시키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롯의 생명을 회복시켰다.
1998년에 발표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작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존 밀러 대위가 특공대원들을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독일군 사이에 고립된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내용을 다룬다. 과연 한 사람의 생명이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을까? 왜 다른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귓가에 맴돌게 한다. 아무튼 그들은 극적으로 라이언 일병을 만나 구출에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밀러 대위가 총에 맞아 전사한다.
성경에는 유사한 비유가 등장한다.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자 목자는 양 99마리를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에 따르면 한 마리를 무시하고 남아있는 양 99마리에 집중할텐데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양 99마리를 위해 한 마리는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의견대립이 있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할 때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선호한다. 어디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친구들과 의논하다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자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돈까스를 먹자는 쪽으로 편이 갈렸다. 의견이 좁혀지지않자 할 수 없이 다수결로 결정하여 중국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다수결이 위력을 발휘한다. 다수결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결의 법칙에는 다수의 힘에 밀려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는 함정이 숨어있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당에서 채택한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면 배신자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경우가 정치권에서는 허다하지 않은가? 소수의 목소리가 침묵하는 다수를 흔들어 깨울 때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수의 힘이 소수를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의 목소리를 존중한다. 천하보다 귀중한한 생명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한 생명의 편에 서 계시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든 것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롯이 목숨을 걸고 구할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바치셨고 우리를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 높여 주셨다. 우리가 사랑을 주기전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다. 왜 그렇게 자기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셨을까? 하나님에게는 한 생명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고 재산이고 소중한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 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정기원 목사 (602)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