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태산같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62

모세는 이스라엘 군대를 편성하면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지도자를 뽑았다. 아이러니컬하게 롯의 가족은 롯과 그의 아내,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딸과 예비 사위, 결혼한 두 딸과 남편들을 모두 합하면 10명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이 롯의 신변을 걱정하기는 했지만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그가 하나님과의 논쟁에서 롯의 가족을 염두에 두지않은 것은 분명하다. 숫자 50과 10사이에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담겨있고 아브라함의 생명을 향한 간절함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은 징검다리가 있다.
소수의 의인과 다수의 악인
만약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의인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포로교환하듯 서로 맞바꿀 수 있을까?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지않고 묵과하거나 방치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조직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이 따라야하는 게 보통 사람들이 가진 통념이다. 잘못한 사람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잘못이 없는 사람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정의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개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의인들을 위한 구원이다. 어느 한 쪽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면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기때문에 두개의 축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같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심판을 행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서 양측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 용서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피의 복수가 계속될 뿐이다. 어린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중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병원이 폭격을 받아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태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벌이는 처참한 전쟁터에서 과연 하나님이 그 현장에 계실 지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서도 유대인 포로를 구해준 아랍인, 아랍인 포로를 살려준 유대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런 따뜻함이 차가운 전쟁터를 녹인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런 면에서 그는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아브라함은 정의와 심판의 문제를 생명의 가치와 존중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심판을 위한 심판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심판의 목적은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게 아니라 생명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에 있다. 심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변화시켜 생명을 살려야 한다.
심판을 통해 생명을 말살하는 게 목적이라면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그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계의 회복이 결여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정의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그는 믿었다. 그가 언제부터 정의에 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을 갖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정의와 사랑, 그리고 구원과 심판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정의를 구현하고자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원칙은 사랑과 정의이다. 사랑은 용서를 필요로 하고 정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공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난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사랑과 용서대신 정의의 심판을 선택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입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으며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 칼을 들고 무자비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중세시대에 이단행위를 하는 사람을 색출하여 제거하기 위한 마녀사냥이나 사람을 인간 새장 안에 가두고 높은 곳에 달아 놓아 벌거벗은 채 그 안에서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도록 한 잔인한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고 이교도들을 제거하기 위해 교황의 주도하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인간의 더러운 탐욕에서 빚어진 약탈과 야만적 행위를 일삼은 잔인한 전쟁이었다.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정의를 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의의 본질에서 벗어난 범죄행위였다. 아브라함은 한 명의 의인이 소돔과 고모라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도시로 바꾸고 그들을 구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구원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심판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책인지를 묻는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목숨을 거는 목자의 마음으로 방황하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희생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