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정기원 목사 알수록 재미있는 성경 나눔] 태산같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71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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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석별의 정을 노래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기보다 아브라함은 이별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그들을 보낸 뒤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빛 바랜 사진들을 보기 위해 앨범을 뒤적이거나 그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녀와 아들을 보냈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서 보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쉴라(Shillah)이며 이는 이혼이나 노예의 해방에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여지를 남기고 설득해서 임시거처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갈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뒤 그들을 보냈다. 아브라함은 정에 이끌려 결정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서 벗어나 이스마엘에 대한 집착을 끊고 완전히 그를 포기하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하갈이 처음 아브라함의 집을 나갔을 때 애굽 사람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애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갈 곳을 잃어 방황할 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장소는 어릴 때 뛰어 놀던 고향일 것이다. 이번에도 그들은 애굽을 향해 이동했다. 아직 그리움이 남아있는 애굽은 그들이 가야할 최종 목적지였다. 애굽의 화려함과 물질적인 풍요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유혹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떨어져 죽게되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그늘이 있는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자식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고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식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지못해 광야에서 죽는 것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라가 이삭에 대해 끈끈한 모정을 보여준 것처럼 하갈 역시 모성애에 불타는 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게 되자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을 고향에 보낸 것처럼 그녀는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헌신적인 사랑과 다함이 없는 희생은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었을 때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났다. 그녀에게 하갈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여종으로 불렸을 뿐이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마치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그녀는 잊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하나님은 그들이 울부짖을 때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 우물을 찾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이스마엘을 축복하고 그를 보호하셨다. 이삭을 조롱했던 그는 광야에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 그가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2번이나 경험한 광야에 거주하는 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는 애굽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칼과 활에 의존하며 사랑대신 무력에 의한 정복과 보복을 우선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대제사장들과 그들이 이끄는 무리들이 몰려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에 참여해 유산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아브라함 집을 떠난 그에게 유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애굽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성경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을 다루면서 이스마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하갈의 아들, 여종의 아들, 소년, 또는 어린 아이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이름없는 자가 되어 무대에서 사라진다. “항구의 남자는 바다가 고향이란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노예의 남자는 광야가 고향이란다”. 이삭이 미래의 남자라면 그는 과거에 묶여있는 과거의 남자이다. 이스마엘은 육체적 관계에 의해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자유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종 하갈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한 것과 달리 자유인 사라는 은혜와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시내산에 속한 사람이라면 사라는 복음을 상징하는 시온 산에 속한 사람이다. 한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만 한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변화와 자유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벽을 넘어 믿음과 순종이 가져오는 참된 자유를 누린다. 종교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자유가 없는 삶은 고통으로 뒤범벅이 되어 기쁨과 평안이 없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자유와 기쁨이 없다면 당신이 믿는 것이 과연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기원 목사 (602) 804-3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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