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의식을 거행할 때 언약의 당사자가 바닥에 놓여있는 동물의 시체 사이를 통과한다.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언약의 당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는 동물의 시체와 피가 흥건하게 베어있는 죽음의 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언약의 의식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다. 동물의 시체 사이를 누가 지나갔을까? 아브라함이 지나갔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지나가셨을까? 성경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나가셨다. 왜 하나님이 그 길을 직접 통과하셨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동물의 시체 사이를 통과하여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는 예표이다.
언약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가 있다. 하나님이 동물의 시체 사이를 지나간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룰 것을 약속하고 보장하신 표시이다.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언약,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지는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완성될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이다. 언약의 기본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면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죄의 용서를 구하기 전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에덴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는 우리 안에 깊숙이 파고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자유와 기쁨을 잃어버린 삶을 살게 했다.
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다. 예수의 피로 죄에 대한 처벌이 따르는 정의와 법대로 처리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되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또 언약을 통해서 바벨탑 사건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한 곳에 정착하여 스스로 자기 이름을 내고 이방신을 섬기며 사람의 영광을 구했지만 그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다른 언어때문에 통역을 하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분리하는 수많은 벽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많은 벽들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예수의 죽음에 의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모래 알처럼 흩어져 하나가 될 수 없던 사람들이 나라와 인종과 민족과 언어의 분리와 단절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질문했다. "너는 반드시 알라"는 말씀으로 답변을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400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 것이라는 약속대로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심판하신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재물을 얻고 그 곳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어려움을 겪은 후 재물을 얻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패턴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즉각 주시지 않았을까? 왜 그들은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살면서 때를 기다려야 했을까?
성경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않았기 때문에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아모리 족속의 악함과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참고 또 참고 인내하신다. 비록 그들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오랜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늦게 가는 길을 택하셨다. 악인들의 생명도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인들을 위해 의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한번의 심판으로 모든 일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방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이 빛으로 나오도록 하는 일이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정기원 목사 (602) 804-3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