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눈 깜빡할 사이에 13년이 지났다. 이스마엘은사춘기에 접어들자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잘 안되면 곧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서슴없이 대들거나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
치마바람이 거세 회오리 바람이 부는 명문학군에 거주하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입시학원에 보내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게 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잘 보내도록 그를 뒷바라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스마엘은 누가 보더라도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확실한 후계자로서 집 안의 유일한 희망이며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이스마엘이 점차 아브라함의 집 안에서 자리를 잡고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이 때 그의 나이는 99세였고 100세가 얼마 남지 않은 중요한 시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엘 샤다이(El Shaddai)"는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의 의미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신다는 의미와 더불어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칭호이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의 책이라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과 함께 그에게 주셨던 땅과 후손에 관한 약속을 다시 한번 일깨우셨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 엘레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했지만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나자 그를 마음에 두었다. 거듭 반복되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90세에 아이를 낳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은 마음을 비우고 이스마엘이 잘 살기를 하나님에게 간청했다.
장미빛 환상에 사로잡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졸이고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과거에 발목을 잡혀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여 하늘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불행한 일이다. 공중에 나는 새를 가지고 싶어하기보다 지금 내 손 안에 있는 작은 새를 놓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거나 과거를 후회하는 과오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법칙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반드시 착한 사람이 잘 살고 나쁜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도 많이 있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많은 변수와 더불어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가능한 현실 너머를 바라보게 하지 않는가? 적어도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언약의 의식을 거행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언약은 일방적인 계약이 아니라 쌍방이 함께 책임을 지고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 언약의 당사자에게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언약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와 헌신을 요구하신다. 창세기 15장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주도하는 언약을 다룬다면 17장은 인간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언약의 문제를 다룬다. 15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의식을 거행하고 언약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과 보장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17장의 주체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았다. 그는 신실함으로 언약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언약의 증거인 할례를 행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올바른 부부생활을 위해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친구들과 만나서 놀다가 늦으면 자고 들어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는 달라져야 한다.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불가피한 일이 생기면 배우자에게 미리 사정을 이야기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아무 말도 없이 외박을 하거나 상대방을 속이면 결혼생활이 지속될 수가 없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간섭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고역으로 여길 수 있지만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기쁨이 온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니 후회가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 만나봐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냥 참고 살아야지 별 수 없어요."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그건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오는 잘못된 생각이다.
정기원 목사 (602) 804-3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