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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Feb
[인터뷰] 창공에 펼쳐 놓은 꿈이 그 누구에게는 희망이 되길작성자: 아리조나타임즈 조회 수: 392
이광진.
32세.
그는 2500시간 비행경력의 파일럿 교관이자 당당한 젊은 사업가이다.
그는 현재 Fly Goodyear 비행학교의 총 매니저로 일하면서, 한국에서 비행을 배우려는 학생들을 유치하는 Flying High Avaition이라는 회사와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교육용으로 제공하고 렌트하는 Fly High Aircraft, 그리고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로 돌려주기위한 Fly High Korea라는 3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흙수저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 자리에 있기에 창공에 펼쳐놓은 그의 꿈은 더욱 값지다.
말썽만 피던 중학교 시절,
그의 부모님은 그를 잘 아는 선교사님이 계신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라는 나라로 유학을 보낸다. 말이 유학이지 말썽만 피던 자신을 '유배'보냈다고 그는 표현한다. 교육시스템이라고는 전혀 갖춰지지 않은 현지 학교에서 그는 영어와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일상에 너무도 당연히 있었던 것들이 없는 나라.
어두우면 전기불을 켜고,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물이 필요하면 손가락으로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콸콸 쏟아지고, 가스레인지만 켜면 불이 켜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그곳에는 없었다. 그가 지낸 곳은 선교센터였지만 다른 주민들의 집들과 별반 다름없는 시설이었다고 한다. 물은 길어와야 하고 발전기를 돌려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해서 하루 2시간정도만 전기를 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라이베리아는 치열한 내전으로 인해 길거리에 수많은 시체들이 그대로 방치 되어 있을 정도로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1년반 동안의 유학 생활 가운데 그는 어린 나이지만 그동안 누렸던 일상의 당연함에 감사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다시 대구로 돌아와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돌아온 후에 그가 적응하는 것은 리베리아로 가기 전보다 더 힘들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진로를 예술 쪽으로 정하고, 대구예술대학교에 입학 후 해외에서 재즈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네덜란드 음악대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대학을 다니면서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 봤는데, 당구장 알바, 택배, 오토바이 퀵, 치킨집 배달, 피자집 배달까지 유학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배달일도 단계가 있어서 처음에는 식당배달부터 시작해서 경험이 쌓여야 퀵이나 택배를 할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가 원하는 네델란드의 재즈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막막한 미래였지만 그는 나름 열심히 공부해 재즈 뮤지션이 되기위해 노력했다.
그는 군복무 때문에 네덜란드 대학교를 다니던 중 휴학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육군 3사관학교의 군악대에서 복무를 마쳤다.
전역 후, 돈을 벌기위해 라이베리아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한국에서 영어 강사 (토익, 회화)로서 일을 하다가,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한국에서 경북대학교 방문교수로 일을 하고 있는 미국국적의 여자를 만나 25살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과 결혼해준 와이프에게 아직도 그는 고마움을 말한다.
당시 그가 가진 돈은 500만원이 전부였고 결혼 후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계속음악을 공부하는 것이나 아니면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2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 와서 진로를 고민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파일럿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가 파일럿이 되기 위해 공부할것을 결심하는데는 "무엇을 망설이느냐, 너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하는 장모님의 호탕한 지지가 큰 몫을 했다고 한다.
파일럿이 되기위해 학비가 1억 원 정도가 드는데 수중에 1000만원 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학기를 일단 시작했다. 중간에 돈이 모두 떨어지면 잠시 학교를 멈추고 toys R us 장난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렇게 해서는 비행학교는 커녕 가족들 생계도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자신이 다니던 비행학교의 교장을 직접 찾아가서 자신이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 및 과외를 하겠다고 제안해 힘들게 승락을 받아냈다. 그는 차근차근 돈을 모아 결국 비행학교 과정을 하나씩 이수하였고, 그러던 중 아이를 낳았고, 계속해서 매일 1시간 거리의 비행학교와 영어 수업을 병행하면서 돈을 벌어 학비를 대고 한 끝에 결국 교관 자리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교관이 되기위해 자가용 면허는 물론, 계기비행, 상업용, 멀티 엔진 레이팅 등 모든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그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믿고 힘을 보탠 가족의 든든한 지지가 있었다고 한다.
교관이 된 후 그는 학교 교장에게 제안하여 비행학교에 한국인을 유치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조건으로 사업을 제안하였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여 단시간에 50-100여명의 학생을 유치하여, 사업적 큰 성과를 올림과 동시에 경제적 큰 안정을 이뤘다.
그러면서 둘째 아이도 낳고, 32살의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업적으로 역량이 커지면서, 학교 내에 자신의 비행기를 구입하여 학교에서 운영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인 총 매니저 역할과 교관으로서 현재 2500시간 이상의 비행 시간을 보유하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유년기는 아프리카, 대학은 네덜란드, 그리고 결혼 후 미국에서 삶을 살면서 어려운 시절을 경험함과 동시에 자신이 매순간 할 수 있는 도전들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이겨낸 그다.
네덜란드 대학교 장학금 받은 것도 직접 이메일을 보내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영상으로 테스트를 봤고, 최종 장학생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비행학교 다닐 당시에도 학비가 없었을 때, 학교장에게 찾아가 영어 수업을 열게 해주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 제안하여 돈을 벌었고, 나중에 교관이 된 후, 학교 사장에게 사업을 제안하여 비행기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도전을 통해 길을 열어갔다. 그는 그래야 되는 줄 알고있다.
그는 포부를 얘기했다.
그는 "흙수저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싶습니다. 내가 세상의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되돌려 줘야겠지요. 그러기위해 강연, 방송을 많이 해서 인지도를 쌓아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일년에 2, 3명씩이라도 기숙사도 제공하고, 비행기술도 가르치고, 꿈을 찾는 이들을 돕고싶다고 했다.
또한 아프리카에 학교를 세우는 일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더욱 지원을 늘려 많은 아프리카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 세상에서 당당하고 힘찬 출발을 할 수있게 돕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제 시작했는데 그가 품은 희망과 포부는 저 멀리, 더 높이 앞서가고 있다.
그는 2달전 그의 삶과 꿈을 한권의 책속에 담았다. Fly High는 그의 회사이름이자 그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한 젊은이가 펼친 꿈이 그만의 꿈이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품을 희망의 꿈이 되기를 응원한다.
그의 저서 '플라이 하이' 구매정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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