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지나고 나니 예년보다 빨리 내려간 기온으로 제법 가을 냄새를 풍겨준다. 얼마만에 맛보는 가을냄새 인가. 생일이 항상 추석 전후로 들어 있으니 먹을 복은 타고 났나 보다. 그야말로 말만 들어도 풍성한 가을의 시작.
지난 두 달 정도는 밤하늘에 달과 별을 보지도 못하고 세월을 흘려 보냈다. 더디가도 아까운 인생을 달리기만 했다. 아! 목놓아 기다리던 그리운 가을이 우리 주위에 천천히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낀다. 추석을 하루 넘긴 커다랗게 덩그렁 떠있는 달을 보면서 그래 바로 저 모습이야. 너그러움과 풍족함과 아무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저 모습을 우리는 늘 반기며 살아왔다. 고국의 산천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는 모습까지 겹쳐지니 부러울 것 없는 하룻저녁이다.
가을에 찾아 오는 코스모스 꽃을 좋아한다. 화려한 장미도 아니고 흔한 카네이션도 아니고 가녀린 긴 목을 가지고 제일 꼭대기에 가냘픈 꽃잎이 매달려 바람이 불면 곧 쓸어질 것 같은 꽃이 어찌 저리도 강할까? 인생도 코스모스에 비교해 본다. 여리디 여린 아기의 모습에서 모진 풍파 다 견디면서도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와 같은 모습.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일까 제법 굵은 빗줄기가 밤사이 줄기차게 내렸다. 모두가 잠이 든 이 새벽시간에 홀로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호사스러운 시간이다.
거리도 깨끗하게 씻어 주고 먼지에 덮인 듯 초록잎이 아니고 히뿌옇게 맥이 빠진 나뭇잎들도 말끔하게 만들어 주겠지. 무엇보다 세상에 찌든 우리의 마음도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로 시원하게 씻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홀로 있는 시간이 참으로 좋다. 누군가 할 수 있다면 이런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하면 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겉치레의 흐름에 같이 흘러가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 고독한 시간을 맛 보는 것도 이런 고요한 시간을 가져 볼 때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더 투명하게 단련시키는 시간이라고 할까. 남들로부터 흔하게 듣는 쓰잘데기 없는 얘기에는 쉽게 귀를 기울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말하는 소리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특히 밤에 비오는 소리를 들으니 어디 멀리 아득한 곳에 와있는듯 마치 딴 세상에 온 것같다.
'신은 인간을 완성시키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면 우리는 인생을 좀 더 겸허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만 오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사는 것이 조금은 더 쉽지 않을까. 세상에서 떠드는 만병통치약도 늙어감을 고쳐주지는 못한다. 늙어감은 무엇인가, 그냥 자연의 섭리가 우리를 늙어가게 만든다.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니 늙어감을 서러워하기 보다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녹슬지 않도록 가꾸라고 가르쳐 주는 섭리임을 깨달았다. 인생은수많은 갈림길에서 헤멜 때가 참많다. 그러다가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잠시 왔다가는 인생, 그래서 아침안개같다고 하지 않던가. 부질없이 가진 것에 매달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는 날이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알고 깨닫는 날, 그날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조선시대의 저술가, 시인, 철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8.5-1836.4.7)은 '우래(憂來)'라는연작시(連作詩)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쩔수없이늙고(無可奈何老)
어쩔수없이죽지(無可奈何死)
한번죽으면다시태어나지못하는(一死不復生)
인간세상을천상으로안단말인가(人間天上視)"
인생 앞에서는 누구나 애잔하고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임에 틀림 없다.
09. 25. 2016
미셸 김/아리조나 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