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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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레오. 요놈이 나의 별명이다. 양쪽에 달린 스피커로 음악이 빵빵 터려나오는 그 스테레오. 내일로 없어질 지, 일주일은 갈 지, 아니면 무려 한 달을 견뎌낼 지, 그 별명의 수명을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은 에스, 티, 이, 알, 이, 오, 요게 내 별명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삶보다는 내 색깔이 뚜렷한 삶을 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결과는 그 누구보다도 더 평범하게 지금까지 살아버린 내 인생 탓인지, 어떤 이는 몇 개씩이나 갖고 있는 별명을 나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알고보면 그리 썩 좋지 않은 별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이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으나 지금이라도 별명 하나를 무슨 훈장처럼 달았으니 나로서는 참말로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하려고 하려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잠을 깬 그 상황에 좀 헷갈리는 구석이 있다. 꿈속에 푹 빠져있던 나를 아내가 깨웠는지, 아니면 기특하게도 내 스스로 눈을 떴는지 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가 내 곁에 없던 걸로 봐선 내 스스로 눈을 뜬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눈을 뜨면서 여기서 쾅, 저기서 쾅, 아내가 내던 소음이 들린 것으로 봐선 아내가 나를 깨웠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도 같고. 둘 다 틀린 말이 아니라면 나는 기꺼이 아내가 나를 깨웠다,라고 간주하고 싶다. 종내는 스테레오라는 별명으로 연결되는 그 상식 이하의 무지한 행동이 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 취한 자발적 행동이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누군가는 물론 아내지만) 타의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취한 행동이었다,라고 하면 그래도 내 체면이 덜 구겨지는 일이니까. 


곤히 자고 있는 나를 아내가 마구 흔들어 깨웠다(이왕 아내가 깨운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마당에 사족을 좀 붙여 마구 흔들어 깨웠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안경을 더듬거려 찾고서 벽시계를 쳐다보았을 때 시침과 분침이 거의 수직에 가까워 있었다. 겨우 새벽 6시가 조금 지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자정이 오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드는 사람에게나 6시가 새벽이나 아침인 것이지, 나처럼 밤 3시 언저리에 침대에 찾아든 사람은 6시는 한밤중이다. 그러니까 새벽 6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라는 표현을, 밤의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사위는 먹물을 뿌려 놓은 듯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라고 바꾸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럼 다시 이렇게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한다.


곤히 자고 있는 나를 아내가 마구 흔들어 깨우는 통에 나는 온 사위가 먹물 뿌려 놓은 듯한 깜깜한 한밤중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닌 밤중에 왠 홍두깨냐고 아내에게 투덜투덜 불평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나는 발만 투덜투덜 옮겨 놓았다. 아내가 나를 이끈 곳은 차고로 통하는 문이었다. 문을 열고 차고로 들어선 아내를 따라 내가 차고로 들어서자 내 등 뒤에서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결인가 싶었던, 여기서 쾅, 저기서 쾅, 했던 소리가 바로 이 소리였다. 환히 불을 밝힌 차고 안에서 아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내의 눈이 토끼눈처럼 동그랗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이게 무슨 냄새같아?"


 냄새는 무슨  냄새? 하려다말고 나는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내 코가 갑자기 개 코가 된 것인지 킁킁대는 코 속으로 좀 역겹다싶은 냄새가 마구 헤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코를 킁킁대는 나를 그 새삼스런 토끼 눈으로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냄새나지? 나는 무슨 전선 타는 냄새 같은데, 자긴 뭐 같애?"


전선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언뜻 분간이 가지 않는 냄새였다.

"기름 냄새 아냐?"


 차고에 세워진 차에서 기름이 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 거였다. 사실 코를 킁킁거렸을 때 기름 냄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진짜 기름 냄새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을 구석이 하나 없다니까. 영화나 소설에서 종종 접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이 이 차고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증언석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자꾸 그렇지 않다고 추궁하는 검사나 변호사의 화술에 휘말려 고개를 갸우뚱하는 장면. 바보 한 사람 만들기 식으로 사실인 것을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소설의 한 대목. 뭐 그런 것 같은 현상이 내 코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기름 냄새 같지 않았는데 기름 냄새라고 말해 버리니까 진짜 기름 냄새처럼 느껴지는 것. 대체 인간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차를 체크해 봤는데 기름 냄새는 아냐."


하긴 아내는 여기저기 쿵쾅 쿵쾅 소리를 냈으니 체크해 볼 것은 다 해 본 뒤일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냄새가 뭘까? 범죄 현장에서 한가닥 실마리라도 잡아내려고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는 형사처럼 나는 차고 이곳저곳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냄새가 날 곳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냄새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싶어 천장에 매달려있는 줄을 당겨보았다. 쿵, 하고 접혀던 사다리만 주욱 펴지며 밑으로 내려왔을 뿐 코로 들어왔던 그 역겨운 냄새는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혹시 밖에서 들어오는 냄새 아냐?"


차고 안이 아니면 밖에서도 냄새가 들어올 수 있겠다 싶어 아내에게 물어보았던 것인데 매사에 꼼꼼한 아내가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을 리 없었다. 아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와중에도 몸의 생리현상은 쉼없이 진행되어 나는 화장실 생각이 간절해졌다. 화장실을 찾아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물었다.


"어제 저녁, 차고 들어온 적 있어?"


바로 어제 저녁 일인데도 내가 차고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얼른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아무리 잦아졌다 해도 불과 어제 저녁의 일을 잊을 만큼의 나이는 아직 되지 않았다. 내가 어제 저녁 차고에 들어왔는 지의 여부를 쉽게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은 치매로 점점 가까이 접근하는 내 나이 탓이 아니라 단지 쉽게 기억해 낼 만큼의 중차대한 일이 어제 저녁 차고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일 뿐.


'아, 그렇지. 바로 스테레오야.'


방광을 채웠던 노란 액체가 시원히 밖으로 빠져 나오고 있을 때였다. 내가 차고로 들어갔는지의 여부를 줄곧 생각하다가 떠올린 것이 바로 '스테레오'였던 것이다. 아내가 쓰지 않는 물건들을 차고로 옮겨 놓으면서 무게가 꽤 나가는 스테레오는 거실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던 것인데 그걸 내가 어제 저녁 10시 쯤 차고로 옮겼던 것을 결국 기억해낸 것이다. 그때 차고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새벽에 냄새가 났으니까, 그것도 아내의 말을 빌리면 전선 타는 냄새였으니까, 분명 스테레오의 내부 어디선가 합선이 일어났던 모양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으리라.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을 끝낸 나는 쾌재를 부르며 다시 차고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갔다. 

 

"아니, 그걸 왜 다시 들고 들어와?"


부엌에 있던  아내가 거실로 들어오는 나를 보면서 한마디했다. 내 손에는 덩치 큰 스테레오가 들려져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차고로 이것을 옮겨 놓았을 때는 냄새가 나지 않았거든? 그 후로 냄새가 난 거니까 이놈이 범인이지. 이 안 어디에서 뭔가 지글지글 탓을 거야?"


나는 스테레오를 거실 바닥에 내려 놓으며 가슴을 쭉 펴고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더 했다.


"이제 차고 안 공기를 빼. 그러면 다시 냄새가 나지 않을 거야. 범인을 여기 잡아다 놓았으니까."


그때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표정은 뭐랄까, 정신나간 이 남자 참 안 됐다, 아니면 이 무식한 남자가 내 남편 맞나, 하는 정도?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오네. 전원도 꽂지 않은 스테레오가 타긴 어딜 타?"


 그리고 아내는  깔깔깔 웃어 제쳤다.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온다는 아내에게서 웃음보가 터진 것이다. 아내 말은 맞고도 맞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런 무지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전원도 연결하지 않은 스테레오가 탄다? 그 냄새가 하도 지독해서 차고 안을 꽉 채우고도 모자란다? 분명 나는 그때 비몽사몽이었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내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곤히 자는 나를 아내가 마구 흔들어 깨운 탓에 말이다. 그것도 먹물 뿌려 놓은 듯한 깜깜한 한밤중에.


 결국 냄새의  진범을 밝혀 낸 사람은 그래도 나였다. 온수 물 탱크가 그것이었다. 차고 한쪽 구석에 처박힌 물 탱크 쪽으로 내 코를 바짝 들이밀었을 때 뭔가가 타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내 코로 확 들어왔던 것이다. 아내가 느긋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코를 킁킁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서 결국 진범을 찾아내고야 말았던 것은, 어떻게든 내가 당한 창피를 만회해 보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리라. 

학교로 출근해서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나와 거의 같은 시각에 학교에 도착한 아내에게서였다.


"차 안에서 얼마나 웃었던지 차가 흔들흔들했어."


 차가 흔들릴  정도의 웃음이 부족했던지 아내는 전화통에다 대고 또 깔깔깔댔다.


"스테레오,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


 내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야말로 오늘 즐거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스테레오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거실로 들어서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누군가를 '스테레오' 라고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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