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대대로 즐겨 부르는 우리의 전통노래 "아리랑" 을 주류사회 미국인들이 흥얼 거리도록 만들고 싶어 축제 이름을 한국 축제 "아리랑"이라고 붙였습니다. 1,000 여년 전부터 작곡, 작사자도 없이 대대 손손 내려 오기 시작한 노래. 한많은 민족 의 한(恨)이 서려있는, 슬플 때나 기쁠 때 나 백성들이 즐겨 불렀다는 우리의 가락을 이 땅에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8도 아리랑을 다 들어 보았지만 어찌 그리도 가슴을 절절 울려 줍니까?
세계의 초 강대국, 없는 것이 없다는 미국. 모든 것이 너무 발전해서 우리가 맞 설 수 없는 미국. 그러나 이들에게 맞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천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우리의 정신문화,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찬란한 문화. 한국을 괴롭혔던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던 당시 훔쳐 간 수많은 문화재와 도자기들, 자기들에게 없는 한국의 높은 선비정신과 혼이 배어있는 문화가 부러웠습니다.
오래전이지만 서울에서 학창생활을 할 때, 미국문화원, 영국문화원, 독일문화원 등을 두루 다니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특히 영문과 학생들이라면 외국 문화원을 섭렵하는 것이 자랑이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도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이 마치 그 나라를 배우게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시절이 물론 많이 그립기도 합니다. 건강 때문에 피닉스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창 건강이 나빠 늘 기도할 때마다 침대에서 혼자 일어날 만한 건강만 허락해 주시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힘쓰는 일은 못하지만 무엇인가 커뮤니티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곳에서 반대로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미국 주민들에게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나성에 가서 총영사님을 만나 허락을 받고는 곧 바로 나성 한국문화원(당시 한국문화관광부 소속)에서 협조하도록 편리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첫번째의 창립기념행사(1997년)로 우선 미국인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당시 미국국무부에서 북한통으로 알려진 키노네스 박사를 초청해서 "두개의 한국,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여기저기 많은 단체들과 연결되었던 터라 영어로 이루어진 첫번째 로 보여주는 한인행사에 미국인들 3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스캇츠데일에 있는 수양회관의 강당이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에 강당은 한국을 알기 위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 중국이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축제가 이미 반세기를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아리랑축제가 주류 사회에 한국을 보여 주고, 이들을 교육시켜야 하고, 더불어 이들과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 한국문화원 의 사명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제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문화공연단 하나 없고, 문화행사에 대한 한인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주류사회와의 연결이 없는 관계로 한단계, 한단계 힘겹게 짚고 걸어 올라가는 것이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아직도 할일이 너무 많습니다.
개인의 영화(榮華)를 위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한국문화원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미국땅에 사는 우리들이 코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적어도, 적어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보다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아집 때문입니다.
중국사회도, 일본사회도, 한국문화원 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뜨겁게 연례축제, 한국어 교육, 시민권 신청, 주류사회와의 협조 등 활발히 움직이니 부러움과 시기심 반반으로 바라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우리는 항상 뒤떨어져" 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부심과 자긍심을 심어 주고 싶어서, 그리고 다른 아시아 나라에 뒤처지는 코리안이 되는 것이 싫어서 몸살이 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 함께 그동안 쌓인 답답함, 억울함, 미운정, 고운정, 아픈 상처들 모두 큰 소리로 다운타운이 떠나 가도록 아리랑을 불러 한인사회가 건재함을 소리쳐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10. 3.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