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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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째의 핸드폰을 분실하던 날, 나는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을 했다. 네 대의 분실이 지난 3년 동안 이뤄졌으니 9개월에 한 대씩 잃어버린 꼴이 된다. 치매 걸린 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세기가 반으로 뚝 꺽인 오십도 되지 않았다. 오십은 커녕 삼 개월 전 겨우 마흔을 넘겼을 뿐인데 이렇게 잦은 분실이라니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허허. 내 입에서 빠져나오는 실소가 내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것일까, 나는 문득 9개월을 주기로 발생하는 핸드폰 실종에는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다 싶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나는 그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은 극구 사양했다. 일요일 오전 11시만 되면 만사 제쳐놓고 성당에 나가 가슴을 탁탁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읊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탈 많고 골치 아픈 일상에서, 그리고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밤마다 침대에 누운 옆구리가 시려오는 총각 주제에 이런 문제까지 내 탓으로 돌리면 요즘 들어 부쩍 불면에 시달리는 내가, 하루가 멀다하고 복용하는 수면제를 약통채 입 안으로 털어넣는다해도 잠으로 쉽게 빠져 들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나도 남들처럼 잠 좀 자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갸우뚱 거리던 내 머리가 이윽고 문제라고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일곱자리 숫자였다. xxx-3841. 지난 8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용해 온 내 전화 번호에 어느날 갑자기 액운이 끼어들었다고나 할까. 순전히 죽을 사(4) 때문에. 그게 언제인지가 불분명할 뿐 액운이 끼어든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나는 대못 박듯 단정해버렸다. 그래서 이참에 전화번호를 한번 바꿔보자, 그런 생각을 언뜻 해 본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음을 난 그때 알지 못했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에 나는 핸드폰 대리점부터 찾았다. 단발머리 여점원이 내민 전화번호 목록에서 액운은 어서 물러가고 행운은 빨리 내게 오라는 의미로 7이 가장 많이 들어간 전화 번호를 선택했는데 x7x-7477, 그것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줄 번호였다. 아니 왠 4가 쓸데없이 끼어있지? 처음에는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럭키 세븐과 죽을 사의 비율이 4:1이면 죽을 사가 행운들 틈에 끼여 맥을 추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내 마음은 이내 홀가분해졌다. 

   

새 박스에서 빠져 나온 지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은 연두색 핸드폰을 침대 옆 탁자에 무슨 보물단지처럼 곱게 모셔놓고 나는 침대 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매시간 피곤이 누적되던 하루였고 새 핸드폰을 구입해야한다는 핑계로 동료 직원들이 잡아끄는 술자리로 발길을 옮기지 않아 세 시간 정도 일찍 귀가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기 전 핸드폰을 한 번 더 손으로 쓰다듬었다. 파란 불빛을 내비치는 액정 화면 속의 시각은 10:35PM.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드는 평소에 비하면 지극히 빠른 시각이다. 핸드폰 분실에서 오는 속상한 감정만 가득했던 어제의 잠자리와는 달리 오늘의 잠자리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것이어서 예상외로 나는 수면제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쉽게 잠 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다.     


딴 따라라라 딴따따… 내 귀로 들려오는 친숙한 음악에 나는 눈을 떴다. 핸드폰 수신 컬러링으로 설정해 놓은 바하의 미뉴에트였다. 이 시각에 누가? 나는 핸드폰의 액정 화면을 반쯤 감긴, 짜증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면에 뜨는 전화 번호는 전혀 익숙함이 없이 낯설었다. 액정 화면의 꼭대기에서 밝히고 있는 시각은 12:03AM. 자정을 겨우 넘기고 있었다.

"니가 숨어봤자 한국땅이지, 니 주제에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었겠어? 존말할 때 빨리 얼굴 내비쳐, 이 개놈의 새끼야. 모가지를 확 분질러버리기 전에, 알았어? 이 개 같은 놈아."

쌍스러운 욕지거리가 계속되는 격앙된 목소리에 나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야했다. 내 귀를 벗어난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쌍스런 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니 때문에 내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널 밟아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어. 야, 망할 개새끼야, 내 말 듣고 있어?"

새 핸드폰에 답례하는 말치고는 너무 험악하고 고약했다. 잠은 벌써 저 만치 달아나고 없었다. 기분 같아선 나도 한바탕 해 주고 싶었지만 이성으로 무장한 도시인답게 나는 거친 말을 삼가고 대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 입을 빠져 나온 말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화 잘못거셨습니다."

"뭐라고, 이 새끼야? 그러고 보니 니놈이 김 사장 대신 전화를 받는 모양인데 니 모가지도 함께 홍콩으로 날아가기 전에 빨랑 김 사장 바꿔. 김기철 개새끼 바꾸란 말이야."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7477의 전 주인이 김 사장으로 통하는 김기철임을 이런 식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핸드폰 저 편의 남자가 오늘 6시부로 7477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를 김 사장의 심복 부하 쯤으로 간주해버린 저 쪽 생각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거신 전화 번호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차분한 내 목소리가 남자의 화를 더 돋구었는지 남자의 목소리는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뭐야? 햐, 요 새끼 봐라, 완전 상습범이네. 니놈이 아무리 그래봤자 나 한테는 안 통하니까 빨랑 김 사장 바꿔. 니 혀 확 뽑아버리기 전에, 씨팔놈아!"


이럴 땐  이러쿵 저러쿵 대꾸하는 것 보다 전화를 딱 끊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란 것을 내 사십 인생이 가르쳐 주었다. 지난 해 겨울이던가, 잘못 걸려온 전화를 단박에 끊지 않고 이런 저런 대꾸를 했더니 상대방은 도대체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혀가 꼬불어진 그의 말투로 봐선 술을 한 잔 걸친 것 같았는데 잘못 걸었다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에, 아, 질펀하게 고독이 묻어 있었다. 나 역시 고독을 매일 밤 껴안는 몸이라 매몰차게 통화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10분이나 이어진 통화를 가까스로 끊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우유부단함에 막심한 후회를 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횡설수설하던 그의 말은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고, 울먹이는 사이 사이 딸꾹질 소리까지 끼어들어 나는 통화를 끊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짜증까지 일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단칼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다시 바하의 미뉴에트가 밤의 적막을 갈라 놓고 있었다. 그 사람 참 질기군. 분명 욕지거리하던 그 남자거니 생각하며 전화를 받지 않을 심산으로 액정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나는 핸드폰을 펼치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010으로 시작하던 남자의 번호와는 달리 이번에는 016으로 시작하고 있어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여보세요?"

누워서 받는 내 목소리는 바리톤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 사장님, 저 미스 강이에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제가 힘들 때 많이 도와주셨는데 저는 지금 별로 도움이 안돼네요. 이곳으로 찾아오시는 거 어려운 줄 알아요. 그러니 계신 곳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갈께요. 제 주제에 누굴 좋아한다는게…"

여자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는 것 같았는데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냥 처진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고 싶어요. 결리신다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뜨겁게 찜질이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솔직한 내 심정은 여자의 말을 계속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고개를 쳐들며 그럴 수 없다 했다. 게다가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와 가늘게 내쉬는 여자의 숨소리에 내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죄송합니다만 전화 번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귀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뚜 하는 심호음 뿐, 여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몸에서 무언가가 뭉텅 빠져나가는 허전함이 내 전신을 휘감아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 호흡을 가쁘게 한 여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 다음날 들려온 목소리는 말끝마다 개새끼를 붙이는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일 주일 동안 하루를 걸러지 않았다. 그 남자의 말대로라면 사기를 당했다는 돈을 찾아려고 그는 그렇게 집요한 것이었다. 김기철을 찾는 다른 사람들의 전화를 종합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아닌데 말이다. 김기철과 동업자로서 그는 조금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개새끼야, 내가 널 찾아내서 닭 모가지 비틀 듯 네 모가지를 비틀고 말 테니 두고 봐."

남자가 찾아낼  사람은 이젠 김기철이 아니라 나, 박경민인 것 같았다. 내 모가지를 비틀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양 손으로 목을 감싸 보았다. 내 목이 굵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화장실 거울 속으로 들어오던 내 목과 손으로 감싼 내 목의 굵기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 했다. 왠만해선 비틀어질 것 같지 않은 굵기의 목이였다.     


다음날, 그러니까 내가 그 남자의 열 네번째의 전화를 받은 날 오후, 나는 퇴근 길에 다시 핸드폰 대리점을 찾았다.

"전화 번호를 다시 바꾸려구요."

대리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예전의 단발머리 여점원에게 나는 연두색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화 번호를 다시 바꿀려고 함은 닭 모가지 비틀 듯 내 모가지를 비틀겠다는 남자의 말에 내가 위협을 느껴서는 몰론 아니었다. 나는 도리어 그 남자가 먼저 나가 떨어지나 내가 먼저 포기하나 궁금하기까지 했었다. 이미 말했듯 굵은 내 목이 어디 그리 쉽게 비틀어질기라도 할 것인가. 어쩌면 나는 김기철이란 사람이 다시 이 번호를 찾아가길 원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를 찾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전화로 김기철이란 사람이 한때 잘 나가던 유흥업계의 사장이었고 우리의 잣대로 가늠하자면 이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부류의 직원들을 아끼고 잘 보살핀 인간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지럽게 또 난무하게 돌아가는 유흥업계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의리파 사람일 거라는 생각도 들어 언젠가는 자신이 포기한 이 전화 번호를 다시 찾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내 호흡을 가쁘게 했던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는지도. 그 목소리를 그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잊어 버리자는 심정으로 대리점의 문을 열고 들어섰었는지도.

다행히 액운이 끼었다고 단정해버린 내 옛 전화 번호는 오매물망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번호에는 7자가 없고 4자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액운이 낀 번호라고 단정을 했던 것일까. 이유야 어찌됐던 그 번호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음에 나는 우선 감사했다. 김기철이란 사람의 삶의 흔적이 내게 매일매일 밟혔듯이, 3841이란 번호를 가져간 그 누군가에 의해 내 삶의 꼬리가 밟히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유흥업계 사장의 전화 번호답게 밤의 어둠이 시작되면서부터 밤의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심심찮게 울리던 바하의 미뉴에트가 더 이상 울리지 않는 밤. 적막만이 깊게 흐르는 밤. 벌써 두 시가 지났다. 이 늦은 시각까지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젠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한 여자의 목소리를 그리워하기 때문인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자정을 기다렸다는 듯 자정을 넘기기가 무섭게 들려오던 그 쌍스러운 욕지거리를 그리워하기 때문인가? 잠 못 이루는 이 밤에 나는 적막감의 한 정점에 누워 파란 불빛만 내비치는 핸드폰의 액정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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