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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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두 번째 기회가 내게 찾아오는 행운을 나는 지난 토요일에 누릴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 단체전 탁구 대회가 있었다. 예선전의 성적이 요행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예선전 1, 2위 팀이 결승 토너먼트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며 다시 결승전에서 만났다. 상대팀은 우리가 유일하게 예선에서 패한 팀이었다. 또 다시 질 수 없다, 통쾌하게 복수를 하자, 라는 것이 우리 팀의 각오였고 상대팀의 각오, 역시 대단했을 것이다. 한 번의 승리는 두 번의 승리로 이어진다, 이긴 팀한테 어찌 질 수 있으랴, 다시 우리의 날카로운 맛을 보여주자. 외나무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듯 두 팀은 대회의 최종지 결승전에서 다시 그렇게 만난 것이다. 어느 팀도 물러설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내 경기가 우승의 관건이군.


각팀 네 명이 단식 경기를 치루는 대진표를 본 내 생각이 그러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내가 이겨야만 단식에서 2대2 동률을 이루어 마지막 복식 경기에서 승자를 가릴 수 있게 편성된 대진표였다. 복식 경기까지 갈 수 있다면 승리의 여신, 니케(Nike)는 우리에게 행운의 미소를 보낼 것이다. 니케는 천하무적 헤라클레스를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 팀에는 머리색이 까만 헤라클레스가 있었다. 그는 천하무적답게 예선전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결승전이라고 해서 결과가 달리지진 않을 것이다. 도리어 결승전에서는 남아있는 힘을 모조리 소진할 테니 우리 팀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상대팀의 모습만 안쓰럽게 쳐다보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추풍낙엽처럼 무참히 쓰러져버린 건 상대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라켓을 들고 있는 손에 긴장으로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고, 아픈 몸으로 결승전까지 뛴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고, 나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상대방 선수의 실력이 월등했다. 왼쪽 오른쪽으로 스핀을 넣는 서비스도 좋았고 자신있게 내리치는 스매싱도 좋았고 간혹 들어가는 나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한 세트도 따지 못한 경기였다. 경기를 끝낸 후 패자인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색한 웃음 뿐이었다. 나는 웃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제발 이 웃는 낯에 침을 뱉지 말아요, 하듯. 또 다른 승리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헤라클레스에게 내 패배의 소식을 전했을 때 헤라클레스도 나처럼 웃었다. 그 웃음은 나의 어색한 웃음과는 달랐다. 한 경기를 졌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죠, 내일의 태양은 분명 오늘처럼 떠오를 테니까 마음 편히 먹어요. 나를 위로해주는 그의 웃음은 천하무적 헤라클레스다운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세 경기가 끝난 후의 우리 팀은 나의 패배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갈대를 흔들릴 정도의 미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우리는 끝모를 바닥으로 떨어질 신세였다.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예선전에서 만났던 두 선수 끼리의 마지막 단식 경기에서 우리 팀 선수가, 패배를 기록한 예선전과는 달리 선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 팀은 뒷걸음질 치며 벼랑 끝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내 몸은 기력을 상실한 패자의 몸답지 않게, 아침에 타이러놀 두 알을 먹은 병자의 몸답지 않게 힘이 새록새록 솟고 있었다. 

   

참으로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을까? 이상하게도 탁구대회가 있기 전 날이면 멀쩡하던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소식을 전해오는 것이다. 지난 해 탁구대회 때가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지난 번 대회 때는 감기 몸살이 이틀 전에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시합 바로 전날 시작되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토요일 아침, 눈을 뜨고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제부터 따끔거리던 목구멍이 여전히 따끔거렸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하품하듯 입을 크게 벌려보았다. 시뻘개진 목젖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울 앞에서 조심조심 움직여보는 몸 역시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기름이라도 한 통 들이부어야 굴러갈 몸 같았다. 

이번 대회는 단체전이다. 지난 대회의 개인전과는 달리 나 하나 불참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려도, 허리가 빠개질듯 해도, 나는 탁구대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타이러놀 두 알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타이러놀을 삼켜버린 내 몸을 거울을 통해 쳐다보는 내 입에선 한숨이 새어나왔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드는 감기 몸살에 무방비인 내 몸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땀을 많이 흘리는 내 몸이 다른 사람보다 감기 몸살에 걸리는 횟수가 잦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자주는 아니었다. 이 세상 누구가 한달이 멀다하고 감기 몸살에 걸리겠는가. 2년 전의 여름이 아마도 내 몸을 이렇게 망쳐놓은 원흉이 아닐까 싶다. 

   

아내와 딸이 한국으로 잠시 나들이를 가고 이곳에 혼자 남겨진 그해 여름. 나는 거의 한달 가까이를 한증막에서 살았다.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어 냉장고 안이라해도 믿을만큼 오싹하게 추운 직장에서 풀려나 차 안으로 들어오면, 차 안에 감도는 따뜻한 기운 때문에 마치 움츠렸던 날개가 활짝 펴지는 기분을 맛보곤 하던 여름이였다. 당연히 차에 에어콘을 가동시키지 않고 집까지 몰았다. 직장에서의 오싹오싹 추운 여운이 남아 있어서인지 집 안에 들어서면서 나는 어릴 적 겨울, 몸을 녹이던 따스한 온돌 생각이 났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10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아리조나 날씨에 집에서 에어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들 아무런 불평 또한 들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집 안의 온도를 80도를 훨씬 웃도는 온도에 맞춰놓고 나는 TV를 보고 신문을 읽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얼굴에 맺힌 땀이 주루룩 가슴으로 떨어지면 나는 수건을 찾았다. 집 안 온도를 내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나는 그때 내 몸을 타고 흘러 내리는 땀으로 집에 홀로 남겨진 고독을 달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뜨거운 사막같은 열기는 싫었던지 윙윙 에어큰 돌아가는 소리가 가끔씩은 내 귀로 들려왔다. 다음 날, 에어콘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학교에서 나는 다시 몸을 덜덜 떨었다. 학교에서 벗어나는 시간에는 몸에 덕지덕지 냉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냉기를 일초라도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차 안에서 그리고 집 안에서 에어콘은 돌아가지 않았다. 냉기는 나의 적이었고 온기는 나의 동지였다. 학교의 냉기를 참다못한 나는 옷장에서 겨울 외투를 꺼내들었다. 까만 겨울 외투는 알록달록 반팔 차림들 속에서 단연 눈에 띄였다. 학교에서 겨울 외투를 입고 근무하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아내와 딸이 한국에서 돌아오고부터 집 안의 온기는 냉기로 대체되었다. 온기가 머물던 자리로 에어콘의 차가운 바람이 파고 들었다. 학교처럼 두툼한 외투는 아니었지만 집에서도 나는 긴팔을 입었다. 8월도 끝나지 않은 한 여름에. 100도를 넘는 아리조나의 그 무더위에.        

  

그해 여름 이후부터라고 짐작된다. 찬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내 몸은 견디지 못하고 감기 기운을 보였다. 콧물이 흘러내렸고 목이 따끔거렸다. 225알을 담은 타이러놀 그 큰 통이 1년도 지나지 않아 바닥을 보였다. 무슨 보약처럼, 무슨 비타민이라도 먹는 것처럼 나는 타이러놀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결과이지 싶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우연이 아닌 내가 자초한 필연. 그해 여름의 궤적 속에서 내가 행한 무지의 필연. 필연에 따라 나는 아팠던 것이다. 지난 해 교민 탁구대회 때의 감기 몸살이 필연이었고 이번 단체전 탁구 대회의 감기 몸살 역시 필연이었다. 

  

지난 해처럼 개인전 대회였으면 분명 불참했을 이번 단체전 시합에서 나는 잘도 버텨나갔다. 보통땐 한 알씩 털어넣는 타이러놀을 경기 중간 두 알을 꿀꺽 삼킨 덕분인지 나는 다섯 번의 경기를 치룬 예선전과 준결승전 그리고 마지막 결승전을 의자에 앉아 쉬지않고 탁구대 앞에서 열심히 몸을 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승의 관건이 걸린 나의 단식 경기에서 나는 패배했다. 내 몸이 아파서가 아닌 실력 차이에서 온 패배여서 나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병자답지 않게 내 몸 어딘가에 아직도 좀 더 쓰야 할 에너지가 남아 있는 듯 했다. 다시 한번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는 바람이 컸다.


나의 바람이 간절했는지 질 거라고 예상한 마지막 단식 경기에서 우리 팀 선수가 힘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내게 다가오는 두 번째 기회를 예상할 수 있었다. 50년이 넘는 내 인생에서 나는 얼마나 많을 기회를 허비했을까. 준비하지 않아서, 경험부족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허비해버린 그 많은 기회들은 대부분이 멀리 걸음을 옮겨 다시는 내 곁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짐은 로또 당첨과 진배없는 행운인 것이다. 그 행운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단식 경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탁구대 앞에 다시 섰다. 내 옆에는 헤라클레스가 서 있었다. 단식 경기에서 2대2 동률을 이룬 후 내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비록 내 옆에는 헤라클레스가 서 있었지만 한번씩 번갈아가며 볼을 치는 복식 경기여서 나 때문에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내가 침착하지 못하고 허둥대면 헤라클레스의 아킬레스건을 내가 자른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허리와 다리를 굽혀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먹이를 보고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처럼. 고목나무처럼 멀뚱히 서서 경기를 임하던 평소와는 달리 내 몸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짝 몸을 낮추며, 먹이를 쫒는 매 눈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나는 내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온 가슴으로 맞아들였다.  

  

이제 최후의 승리을 위해 마지막 한 점만 남겨 놓고 있었다. 내 몸 오른쪽으로 깊게 빠지는 볼을 보고 나는 사력을 다해 팔을 뻗었다. 내 라켓을 가까스로 맞고 네트 저 편으로 넘어간 볼을 상대방이 천장으로 높이 날려 보냈다.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는 볼을 보면서 나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헤라클레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묵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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