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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시발로 1945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하와이 한인사회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인들로는 1930년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현순, 민찬호, 박용만, 이승만 등의 이민 초창기 지도자들이 있고 1930년대 경에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하와이로 들어 온 김현구, 김원용, 이용직 등의 1세 지도자들이 있었다.  

1930년대 이전의 한인사회 갈등은 주로 박용만과 이승만의 성격. 노선차이에서 비롯되었다면 1930년대 이후는 기존 이승만 세력과 본국에서 온 신진 세력간의 갈등이 점증하여 폭력 싸움과 법적 싸움으로 비화하였다. 


해외에 있는 한인들 중심으로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군사훈련을 통하여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박용만은 1910년대 초에 이승만과 원만한 관계속에 하와이 한인사회를 함께 이끌어 갔다. 하지만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고 기존의 박용만이 주관한 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에 도전하여 <태평양 잡지>를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반목과 갈등관계로 들어갔고 결국 이 두사람의 갈등관계 때문에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 이민 100년').  

이승만 박사는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한인  기숙학교를 필두로 한인 여자학원을  맡아 봉사하였고 기독학원을 설립하였으며 <태평양 잡지>를 발간하였고 1918년에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이박사는 스스로 전도사가 되어 동 교회 기도회를 인도하기도 했는데 밤새도록 '광란적 몸짓'을 흔들며 기도를 행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박사가 주도한 <태평양 잡지>는 1930년에 <태평양 주보>로 바뀌고 이박사가 주도한 <동지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이박사와  갈등관계 속에 있던 박용만은 1914년 <국민보> 주필을 사임하고 국민회를 탈퇴하였으며 1919년 대조선 독립단을 설립하여 무장훈련을 통하여 조국 독립에 기여하려고 애를 썼는데 애석하게도 1928년 암살당하고 그가 주도한 독립단은 1935년 국민회에 예속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노령 상해 한성의 통합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상해로 갔던 이박사는 6개월만에 하와이로 돌아왔고  동지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이박사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은 기존의 국민회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박사는 1925년 임정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였다. 

1920년대는  재 하와이 이민 일세들이 더 이상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수 없는 노인세대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박사는 이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임야를 매입하였으며 한인촌을 건설하여 그곳에서 한인들이 농사를 짓고 살도록 했다. 그리고 목재소도 세워 진주만 해군성에 납품도 했으나 불량품이 많이 나왔다고 이덕희는 진술한다. 하지만 자본조달 문제로 결국 이박사의 이상촌 건립은 1931년 동지식산회사의 폐업으로 실패하게 된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1930년대말까지 국민회파와 이승만의 동지회파로 양분되어 갈등관계 속에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조국의 광복기운이 느껴지자 재미 한인사회는 연합협력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1941년 하와이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여 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물론 주도단체는 국민회와 동지회였고 동 해외한족연합위원회의 주요한 사업중의 하나는 재미 한국인을 적성국인 일본의 국민지위에서 제외해 주고 동 위원회가 태극기가 들어간 신분증명용 배지를 발행하도록 요청한 것에 있다. 한족 위원회 외교위원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중국의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불발로 그치자 이 일로 이박사와 동 한족위원회 국방위원이었던 한길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박사는 1943년 자신이 거느린 동지회를 동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도록 하였다(김영목 '초기 미주 한인 이민사').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하와이 이민자들은 귀국문제를 놓고 고민을 했는데 대개는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절감하고 귀국을 포기하였는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본국 정치에 참여하고자 귀국하였고 그 중에 대표적 인물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1945년 10월 귀국하여 '영웅적 대접'을 받았다. 이박사가 가는 곳 그리고 머무는 곳마다 재미한인사회는 국민회파와 동지회파로 혹은 친 이승만파와 반 이승만파로 나뉘는 파열음을 내었지만 그의 일관된 외교중심의 독립운동 노선은 가장 적절한 때 미국의 동조를 얻어 그는 그 발판으로 해방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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