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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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의 숨소리는 가늘었다. 귀를 그의 코로 가져다대어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구부린 채로 바닥에서 자고 있는 그를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가엾거나 측은한 생각이 들기보다는 하루빨리 그의 가슴에 묻고 있는 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우선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 귀로 규칙적이고 가는 숨소리가 가끔씩은 크게 들려왔다. 그럴 때면 굳게 닫힌 그의 입이 조금 벌어지며 푸,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두 번을 연속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덩치가 나와 비슷한 그의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의 어깨와 무릎 밑으로 양 손을 집게처럼 집어놓고 힘을 주어 들어올리자 그는 바닥에서 붕 떠올랐다. 그를 침대에 누일 때 다행히 그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 자로 길게 뻗은 그는 여전히 가는 숨만 내 쉴 뿐이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침대지만 침대 위에서 그는 슬픔이나 절망이나 증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편한 모습이었다. 바닥에서 새우처럼 쪼그리고 누워있는 모습에서는 최고급 융단을 깔아놓았다 한들 그렇게 편하게 보이진 않았을 터였다.

방바닥에는 겨우 한 모금만 빠져나간 목이 긴 맥주병이 주인을 잃은 채 외롭게 서 있었다.


"한국이 술마시기에는 천국이지요."


미국은 새벽 한 시가 되면 술을 마실 장소도, 술을 살 장소도 없다는 사실을, 미국에서 겨우 하룻밤을 지낸 신참내기에게 알려주면서 진우는 서빙하는 종업원이 마지막 콜을 외칠 때 손을 번쩍 들어 그 맥주병을 주문했었다.


"맥주 좀 더 마십시다. 영훈씨의 기숙사 방은 밤 한 시 이후에도 문이 열려있지요?"


종업원이 건네준, 여섯 개의 맥주병이 담긴 박스를 들고 도로를 건너면서 진우는 휘청거렸다. 언뜻보면 맥주 박스 때문에 그의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만도 했다. 나는 맥주 박스를 내 손으로 옮겨 들었다. 여섯 개의 맥주병이 담긴 박스는 텅빈 맥주병으로 채워지기라도 한 듯 무거운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진우는 이제 양손을 앞 뒤로 내저으며 휘청거렸다. 옷깃을 스칠 정도의 미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것처럼 그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은 나의 오른 손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내 손에 잡힌 그의 몸은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았다. 술집에서 그와 내가 마신 양이 별반 다르지 않을텐데 그는 휘청거릴 정도로 취했고 나는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신이 말짱한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 기숙사 방에 들어와서 그는 바닥에 풀석 주저 앉았다.


"우리 건배 한번 할까요?"


그는 무엇을 위해 건배를 하고 싶었을까. 그와 나는 맥주병을 들어올려 쨍 소리를 내며 맥주 한 모금을 각자의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는 고목 쓰러지듯 방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졌던 것이다. 잡음만이 가득했던 술집이 아닌 조용한 방이 주는 분위기가 아늑했는지 그는 줄기차게 놓지않고 있던 정신줄을 한순간 놓아버린 듯 했다. 내 귀를 그의 코로 가만히 가져가보았다. 아기처럼 새근대는 숨소리가 규칙적인 박자를 타고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전등의 스위치를 내리고 창가로 다가간 나는 손에 들린 맥주병을 입으로 들어올리며 눈을 껌벅거렸다. 듬성듬성 눈에 들어오는 불 밝힌 건물의 유리창과 가로등 주위만 어둠을 물리치고 있을 뿐 밖은 온통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쉽게 잠이 오지 않을 밤이었다. 한국과 낮과 밤이 바뀐 시차도 시차지만 술집에서 진우가 들려준 얘기가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탓이었다. 그는 살아있지만 그가 사랑했던 연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건재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그의 어머니는 백번을 죽어 이 세상을 떠났다. 창밖을 쳐다보던 눈이 다시 껌벅거렸다. 허허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그의 환영이 저 멀리서 보이는 듯 했다. 아니, 어찌보면 그 환영은 나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의 환영이건 외로워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갑자기 내 주위를 감싸오는 고독에 벽으로 몸을 기대며 나는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목을 매달기 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그녀가 무어라 썼는지 알아요?"


그때 그는 내 눈을 쏘아보는 듯 했다. 마치 내가 그의 연인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장을 용서한대요. 자기를 죽인 사람을 말입니다. 그녀는 내가 그 사장과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그게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그녀는 사장을 용서했을지는 몰라도 저는 절대로 안됩니다. 제 마음 속에서 사장은 백번을 넘게 죽었습니다."


진우는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를 사장, 사장이라고만 하고 있었다. 사장, 그러니까 진우의 어머니는 진우와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한 평생 만지기 힘든 거액의 돈을 그녀 앞에 내놓기도 했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돈도, 협박도, 그 무엇도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진우의 어머니도 쉽게 물러설 위인은 아니었다. 결국 진우 어머니는 잔인하게도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마지막 카드의 표적이었다.


"언제나 눈에 가시같았던 노조 대표인 그녀의 아버지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던 참에 잘 됐다 싶었겠지요. 비가 엄청나게 퍼붓던 날이었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로 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맹렬히 달려들었죠. 왼쪽 뺨에 긴 상처가 있는 트럭 운전수는 빗물에 미끄러졌다고 했지만 중앙선을 넘게 한 건 빗물이 아니라 사장이 지불한 검은 돈이었지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빗속의 도로. 사장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겠죠.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숨을 쉰다는 자체가 기적이었어요. 그녀는 그날 붕대를 칭칭 감은,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어요.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우는 긴 숨을 내쉰 뒤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몸 속으로 들어간 맥주가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며 그의 빈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당신의 슬픔을 괴롭다 하지말고 서럽다 울지를 마오. 세월이 흐르면 사랑의 슬픔도 잊어버린다. 이 슬픔 모두가 세월이 약이겠지요. 


침대에서 가늘게 숨을 쉬는 진우를 내 등 뒤로 하고 창밖을 내다보는 내 머릿속으로 왜 이런 노랫가사가 흘러 들어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진정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이 그의 슬픔을 쓸어가길 바랐기 때문일까. 머리카락까지 뽑아버리는 강력한 항암제처럼 말이다. 진정 세월이 약이라면 세월아, 화살보다도 더 빨리 흘러가거라. 총알보다도 더 빨리. 어느 누구의 눈에도 잡히지 않게 번개같이 흘러가거라. 

   

소리나지 않게 나는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복도는 희미한 불만 밝힌 채 텅 비어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만이 나를 규칙적으로 따라올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내 손에는 맥주병이 들려져 있었다. 엘리베이트 앞에 맥주병을 들고 선 남자. 그것도 밤 2시에. 영락없는 술꾼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술꾼이면 어떠랴 싶었다. 누군가 내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털어놓기를 원한다면 내 기꺼이 술꾼이 되어 귀가 아닌 내 가슴에 그의 얘기를 담아보리라. 나의 속 마음을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면 나는 또 기꺼이 술꾼이 되어 오고가는 술 잔 속에 나의 애절한 사연을 담아보리라.


일 층 로비도 텅 비어 있었다. 학생들이 앞에 앉아 시청하던 TV도 시꺼먼 화면만 내보일 뿐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처럼 보이는 인도계통의 남학생만이 기숙사 사무실의 창구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나도 저 아르바이트 자리에 신청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고개부터 먼저 돌아갔다. 나의 영어회화 수준은 아직 저 자리에는 한참을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말없이 몸만 움직이는 막 노동 아르바이트면 모를까 영어로 의사 소통을 요구하는 곳에는 아직은 내 자리가 없다.


어둠이 깔린 바깥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밤 두 시의 어둠은 빛만 몰아낸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몰아낸 것이다. 나는 기숙사 정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은 벤치에 앉았다. 술 기운으로 몸에 열이 오른 탓인지 얼굴에 와 닿는 공기가 8월의 바람치곤 제법 차가웠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점처럼 반짝이며 눈에 들어오는 별들은 한국에서 보던 것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저 별들 중에는 엄마의 별도, 구진우 연인의 별도 있을 테지. 겨드랑이에 털도 나지 않은 어린 시절, 아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코 닦는 손수건을 넥타이처럼 가슴에 달고 다니던 시절, 엄마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우면 별들이 총총히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었다. 별들이 떨어질 때 한 아기가 태어나고 그 자리는 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의 별로 다시 채워지지. 그러니까 저 별들은 다 우리들인 셈이야. 엄마가 들려주었던 말처럼 별은 너였고 나였고 우리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영원히 별인 것이다. 다시 별이 되어 저 하늘에 총총히 박혀 영롱한 빛을 발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겠지.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살아온 삶이 저 하늘에서 후회없이 영롱한 빛을 발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진우씨. 살아가는 방법이야 다르겠지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때로는 슬퍼겠지만, 때로는 외롭겠지만, 그러나 희망만은 잃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갑시다. 

슬픈 영혼이 잠들고 있는 기숙사방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내 발걸음 사이로 슬픔과 외로움과 희망이 한줄기가 되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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