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지금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이런 때를 두고 마음이 헛헛하다고 해야하나. 신앙을 가진 사람이니 답답할 때 성경말씀 읽고 기도를 하면 다 풀어진다고 하는데 풀어지지 않는다. 어디가서 얘기를 해야 편해질까,
누구를 만나야 마음속의 얘기를 다 털어 놓고 홀가분 해질까? 대화가 되는 사람과 서로 사는 얘기를, 인생에서 부딪히는 답답한 일상 이야기들, 나눌 수 있는 사람 어디 없을까?
결혼하기 전까지는 광화문에 있던 새문안 교회(담임 강신명 목사)를 다녔다. 함께 다니던 친구 3명이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면 옆에 있던 크라운제과에서 머리를 맞대고 끝도 없는 얘기에 시간가는 줄을 모르던 때였다.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기도하시던 목사님을 잊을 수가 없다"며 당시의 강신명 목사님을 표현했다. 또 청년들에게 "역사를 아파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시대를 향한 용기가 없으면 밥이나 얻어먹는 목사쟁이 밖에 못한다고 충고하셨던 목사님의 말씀은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미국오기 전까지는 영락교회(담임 한경직 목사 1902~2000)를 친구 때문에 6개월을 다녔다. 친구는 미국가면 못 볼텐데 매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그럴듯한 유혹(?)이 있었다. 매주 교회에서가 아니라도 한 주 동안에 2번은 꼭 만났는데 그것도 모자랐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젊은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돌이켜보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은시절이었기에 큰 목사님들 앞에만 서면 머리가 숙여졌다. 6개월 정도 밖에 다니지 않은 영락교회였지만 한경직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가 원래 오래 다니던 교회여서인지 젊은 우리들에게도 늘 따뜻하게 웃음지어 주시던 목사님이 너무 좋았다.
한경직 목사님을 표현할 때 한마디로 쓰는 말이 있다. "모든 것 다 가지고도 아무 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 영락교회의 사료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의 삶은 철저한 청빈으로 일관했다. 담임목사에서 물러난 후 남한산성 영락교회 수양관에 있는 18평짜리 단층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는데 상금 102만 달러를 받자마자 북한선교 헌금으로 전하면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봤다"며 웃었다고 한다. 2000년 4월19일 별세한 그는 휠체어, 지팡이, 털모자, 옷가지 몇 점 그리고 예금통장 하나 없었다.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해 오산학교, 평양숭실대를 졸업하고 미국 엠포리아대,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한 한 목사는 1933년 신의주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42년까지 신의주 제2교회 목사로 일한 그는 광복 직후 월남해 1945년 12월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 교회를 설립했다. 이듬해 영락교회로 바꿔 1972년까지 담임목사로 활동했고 별세 전까지 원로목사를 맡았다.
시대가 어두웠던 시절에는 훌륭한 지도자들의 모습이 더욱더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 교계의 지도자로서 국한되지 않고 활동 영역을 넓혀 어려웠던 당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듯 사회사업, 교육사업, 선교사업 등에 두루 걸쳐 있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왔던 특별한 지도자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헛헛하다고 스스로 투정부리던 마음이 위로가 되는 듯 가슴이 시원해진다. 영혼이 가난한 자들이 위로 받을 수 있는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지.
5월 23일 2011년
▲ 만년의 한경직 목사가 기도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