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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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경기를 끝냈을 뿐인데 내 몸은 마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처럼 허느적거렸다. 내게 승리가 아닌 패배를 안겨준 경기였음에도 나는 짜릿한 희열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건 단지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 몸 왼쪽으로 파고든 볼을,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그냥 손을 뻗어 툭 친 것이 아웃되는 순간 나는 승자라도 된 기분으로 환호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힘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4월 초의 날씨치곤 좀 더웠던 탓일까. 하지만 평균 기온이 100도를 웃도는 이곳의 여름 날씨에 비하면 더웠다고 할 수 없는 날씨였다. 겨우 90도를 넘겼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한 시간 남짓 걸린 경기에서 경기 시작부터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헉헉거렸던 것이다. 땅속으로 꺼져 들어갈 듯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여간 버거운 아니어서 내게 날아오는 볼을 야속한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겨우 겨우 볼을 쫓는 내 몸은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21년 전의 그날처럼.  

   

한증막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테니스장에 서 있는 내 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사정없이 뻗어왔던 그날은, 내가 생각해도 미쳤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했던 그날은, 아리조나의 날씨가 최고 기록을 경신하던 날이였다. 미치지 않고서는,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그 무더운 날씨에 테니스를 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해가 지고 테니스장을 라이트로 환히 밝힌 저녁 때가 아닌, 고개를 젖히면 중천의 해가 눈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대낮이었다. 그날이 122도였음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시청한 TV 뉴스가 알려주었다. TV화면으로 들어오는, 뉴스 앵커맨이 들고 있는 온도계는 120이란 숫자를 넘고 있었다. 앵커맨 옆에 서 있는 보조원처럼 보이는 청년이 손에 들고 있던 계란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리자 지지직 소리가 났다. 뜨거운 열기로 눅눅해진 아스팔트 바닥은 달궈진 후리이팬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지지직 소리를 배경으로 화면에는 122라는 숫자가 하늘에서 막 터진 불꽃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날, 그 더위 속에서 테니스를 치지 않았더라면 122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 심심찮게 110도를 넘어가는 아리조나 여름 날씨니까 122도는 겨우 10퍼센트 안팍의 더위가 더해진 셈이다. 10퍼센트의 기온 상승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아마 나는 그렇게 시덥찮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122도는 섭씨로 정확히 50도가 되는 엄청난 온도임에도 말이다. 섭씨30도만 올라가도 더워 죽겠다고 투덜대던 시절이 있었다. 30도의 온도가 인내의 임계점 정도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 나라가 가난하고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 회사건 학교건 집이건 어디에도 에어콘을 보기가 어렵던 시절, 30도를 넘기는 여름 날이면 으레 후덥지근한 바람이 흘러나오는 선풍기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한참을 떠나지 못했고 밤이 되어도 끈적거리는 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뒤척이며 얼마나 짜증스러 했던가. 30도가 그러할 진대 50도면? 50도는 30도의 한 배 반도 넘는 온도다. 뜨거워 발을 선뜻 집어넣기를 주저하던 동네 목욕탕의 온탕 온도가 40도를 겨우 넘는다. 그 온도보다 10도나 높은 온도라면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들텐데 테니스볼을 쫒아 죽으라고 뛰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날 진짜 죽을 짓을 한 것이다. 인터넷의 도움을 빌려 그날이 1990년 6월 26임을 알아냈다. 1990년이면 21년 전이다. 21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 속의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30대로 막 접어든 젊음을 무기로 테니스에 푹 빠져있던 때였으니까 122도의 더위쯤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단조로운 미국 생활에 내가 진저리를 쳤던 것일까. 그 당시 나는 테니스에 미쳐 있었다. 생계를 위해 필요한 시간, 이를테면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직장을 오고가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통 테니스 생각 뿐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분명, 계란 속 노른자위처럼 노란 테니스 볼이 들어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나란히 줄을 서서. 눈만 뜨면 테니스 볼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고 잠자는 시간에도  테니스는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나는 볼을 쫒았다. 꿈에서 깨면 아쉬움에 나는 테니스 라켓이라도 휘둘러야 했다. 새 기술로 테니스 라켓이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사들인 라켓은 집안 곳곳에 널려 있었다. 거실에, 안방에, 현관에. 심지어 화장실에도 라켓이 있었다. 볼일 보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나는 배에 힘을 주기 전 라켓부터 집어들었다.    

월요일 템피 리그, 화요일 메사 리그, 그리고 수요일의 스카츠데일 리그. 금요일에는 한국 테니스 동호인들과 테니스. 이렇게 정기적으로 잡혀진 스케줄만도 일주일에 네 번이었다. 주말이라고 그냥 쉬면서 넘어가는 법도 드물었다. 리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나처럼 테니스에 미쳐있던 사람들이 수두룩해 서로 교환한 전화번호는 내 수첩을 빼곡히 채우고도 남아돌 지경이었다.

"이번 주말 시간 있으면 테니스 한 번 칠까요?"

리그에서 만난 친구가 그렇게 내게 전화로 물어오지 않으면 내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테니스를 치지 않은 날을 손으로 꼽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리 열심이었는지 내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진다. 설령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든다. 테니스에 몰두한 그 장구한 시간들을 글 쓰는 데 투자했다면(그땐 내가 글을 쓰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긴 글을 쓰리라고 상상을 했다면 그당시 내가 테니스에 미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리그에서 만난 친구가 전화를 했던지 내가 전화를 했던지 그날 우리는 테니스장, 그 뜨거운 땡볕 아래에 서 있었다. 내가 살던 타운 하운스 단지에 마침 테니스장이 구비되어 있어 친구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나는 어슬렁어슬렁 테니스장으로 걸어가 몸을 풀었다.  그즈음 연일 12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뜨거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햇빛이 기승을 부리는 시간에는 에어콘 빵빵 나오는 실내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120도의 더위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한 더위였던 것이다. 어둠이 깔린 테니스장에 불을 밝히며 테니스를 친 시간 또한 한낮 더위가 한물 간 뒤였으니까 110도건 120도건 바람마저 불어온 테니스장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태양 광선이 한 오라기의 여과없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 122도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테니스장에 들어서는 순간 입으로 훅 뻗어 올라오는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태양의 그 뜨거운 열기 못지않은 젊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네트를 넘어가는 볼 수가 많아지면서 우리는 테니스를 치는 것이 아니라 열기와 싸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넘기는 것은 볼이 아니라 태양열이었다. 내 몸을 휘감아 오는 열을 나는 혼신을 다해 뿌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열정과 젊음이 태양과 겨루는 전투였다.

늘 하던대로라면 3판 2승제라 적어도 두 세트는 쳐야했을텐데 한 세트가 끝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테니스 라켓을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렇게 일찍 파장해버린 그와 나의 시합은 누가 승리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태양과 우리의 정열 사이의 전투 역시 승패가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더위에 시합을 시작한 우리에게 일 승, 시합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만든 태양에도 일 승. 1:1 무승부였다.


친구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 에어콘을 한껏 올리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테니스장에서  빤히 보이는 타운 하우스 수영장으로  향했다. 내 몸은 벌써 수영장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20여 미터 떨어진 수영장으로 옮기는 발걸음에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처럼 도로에 내 발자국의 흔적이 점점이 남고 있었다.

웃통을 훌렁 벗어던지고 뛰어든 수영장은 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물이 아니라 달콤한 꿀이었다. 내 몸 세포 하나하나로 달작지근한 꿀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 달콤함, 그 감미로움은 어린 시절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 참을 수 없게 되면 가까스로 꺼내먹던 캬라멜보다, 그리고 여지껏 먹어본 그 어느 쵸콜렛보다 더 달콤한 것이었다. 나는 그 달콤함 속에 영원히 잠기고 싶었다.   


"대단들 하던데요?"

숨이 차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내 귀로 굵직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선처럼 머리카락과 얼굴에 난 수염이 온통 백발 투성인 노인이 의자에 몸을 한껏 젖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더위에 일광욕을 즐기는 것인지 나처럼 웃통을 벗은 노인이 내게는 더위 속에서 고행을 하는 수도승 같아 보였다.

"이 더위에 테니스라. 젊기때문에 가능하겠지요. 젊음, 그거 좋은 거지요. 당신의 젊음을 내가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사겠오."

내 젊음을 사겠다는 말에 나는 잠시 눈을 껌벅거렸다. 젊음은 살 수도 팔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얼마에요? 하려다 말고 나는 파우스트와 흥정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프리지아의 왕 마이더스에게 손에 닿는 무엇이던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힘을 주었던 디오니소스를 떠올렸다. 그가 나의 젊음을 얻는 대신 내가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젊음을 원하지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다시 물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캬라멜보다도 쵸콜렛보다도 달콤한 물 속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내 머리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노인의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가 집으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내가 환영을 본 것인가. 노인이 앉아있던 의자를 쳐다보는 내게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의 답은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친 볼이 아웃되는 순간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나는 네트쪽으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저 편에서 걸어오는 승자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넨 후 나는 그늘진 의자로 걸어가 지친 몸을 쉬었다.

"젊음, 그거 좋은 거지요."

의자에 앉아 잔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어디서인지 노인의 굵은 음성이 환성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불현듯, 21년 전 그날, 122도의 햇빛이 내리쬐는 수영장의 물 속에서 내가 찾지 못했던 그 답이 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젊음'이었다. 90도에도 비실비실하는 지금의 내 몸이 122도의 열기 속에서도 거뜬히 뛸 수 있는 그 젊음.

'누군가의 젊음을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느닷없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는 어느새 영락없는 그 노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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