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뭘 잘 모르시네
저금리와 저물가로 30년 간 ‘돈의 맛’에 취했던 황금시대가 끝나고 있다. 워낙 돈 푸는 재미에 중독되어 있던 각국의 정부가 이제는 긴축을 서두르고 금리는 올리는 마당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뛴다. 그동안 낮은 이자로 빌린 돈으로 부동산, 주식, 암호화폐에 마구 쏟아 붓고, 영끌이라도 해서 자산에 투자해서 경제적 자유민이 되고자 몸부림쳤던 청년들의 어깨도 축 처지는 모양이다. 이제 지난 30년 세계화 시대의 잔치는 끝났다. 더 이상 값싼 원자재와 낮은 금리의 시대는 없다.
1975년부터 약 6년 간 계속된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시대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거덜냈다. 수출과 산업화로 이제 겨우 배고픔이라도 면해보려는 희망이 확산되던 참에 연 16%까지 치솟은 물가는 서민경제를 약탈하면서 전방위적인 불안과 위기를 촉발했다. 1979년에 YH 여공의 신민당사 농성과 김영삼 총재 제명, 뒤이어 부산·마산 항쟁과 10·26 사태로 이어진 격변의 배경에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시점이다.
철옹성 같은 권력까지 날려버리는 이 거대한 태풍의 경고에 대해 이 정권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할 줄 모르는 둔감함에다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그 많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마저 고치지 않는 무능함은 어떤 변명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이 위기는 윤석열 정부 홀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위기가 아니다. 국회와 시민사회 전체가 힘을 모으지 않으면 절대 돌파할 수 없는 위기다. 집권 세력이 자세를 낮추고 협력을 구해도 모자랄 판에 “영수회담이라는 용어 자체를 인정 못하겠다”며 낯을 가리는 윤 대통령은 아직도 대통령이 뭘 하는 자리인지 모르는 것 같다. 게다가 야당의 회동 제안에 대해 “또 하나의 방탄 조끼”라며 매몰차게 거절하는 국민의힘을 보면 이들이 뭘 착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수회담은 지금 야당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대통령과 여당에 더 절실한 거다. 국가가 어려우니 제발 협조해달라고 대통령이 먼저 매달려야 하는 거다.
바랠 걸 바래야지. 검찰과 경찰을 앞세워 “법대로”를 외치며 야당은 고사하고 여당도 추스르지 못하는 지도자가 과연 위기가 고조되면 어떤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사법 권력을 동원하여 사람 두들겨 패는 것이 전부이니 이래서야 어디 정치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겠는가.
지도자의 역량은 위기 때 검증되는 법이다. 무언가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데 대한 직감과 통찰력, 관용과 미덕으로 솔선수범하여 담대하게 국가를 포용하는 결단의 감각이 없다면 그런 대통령은 국가의 자산이 아니라 짐이다. 유신 정권이 바로 그러했다. 야당을 만나는 걸 꺼려하는 저 모양 자체가 애시당초 글러먹은 유신 말기의 꼬락서니다. 자꾸 뭔 회담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침을 뱉을 일이다. 제 명을 단축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잘난 체하는 꼴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건 집권 세력에게도 좋지 않다. 정신 차리길 바란다.
김종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