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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환 목사 기독칼럼] 한국교회 형성 이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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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호레이스 알렌을 필두로 조선에 들어온 서구  개신교회 선교사들은 1889년에는 재한 장로교회 선교사들끼리 연합회를 조직하여 조선내에서 연합적인 복음활동을 전개하였고 이것이 시발이 되어 1905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연합체인 한국 복음주의 선교회 연합 공의회가 결성되었으며 1910년에는 조선내에  하나의 예수교회를 조직하는 형태로 논의가 전개되었으나 결국 각 교단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하여 조선 민족교회에서의 하나의 민족교회건설은 실패하게 된다. 비록 기구적 통합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 이후 조선에 진출한 서구개신교회들은 다양한 형태에서 연합활동을 전개해 왔고 그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일화된 한글번역 성경사업과 통일 찬송가 간행이 그것이다. 또 한가지 조선내 제 개신교회의 연합활동중의 하나는 조선 전국을 특정 교단의 전도지역으로 분할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의 중첩과 갈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것이 후일 전국지역적으로 어떤 특정지역에서는 특정 개신교단이 강하게 발전해 온 원인이기도 하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단기간에 경이로운 교회성장을 이룬 교회의 예로는 많은 경우 한국교회를 드는데 그런 경이로운 교회성장의 원인중 하나로 토착교회의 자율성원리를 예로 든다. 이것은 1890년 서울을 방문한 중국주재 선교사 네비우스가 주창한 선교원리로서 토착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선교부에서 봉급을 주면서 전도사역을 하게 하는 것을 지양하고 토착민이 처음부터 스스로 재정을 부담하면서 전도사역을 하도록 방향을 바꿀 것을 주창한 것이다. 이것은 후일 소위 ‘3자 운동’, 즉 스스로 전도하고(지전) 스스로 운영하며(자족) 스스로 다스리는(자치) 선교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과 토착지도자들 사이의 수준을 차별화하게 함으로써 민족교회 지도자들의 자질향상을 억압하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1879년 만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조선민족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시발로 조선 국내에서는 개신교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우리는 이미 수세받은 최초의 교인중에 황해도로 들어와서 솔내교회를 세운 것을 언급하였다. 이것이 조선국내에서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목사나 장로로 조직된 조직교회는 아니며 그래서 조선 개신교회중 최초의 조직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14명의 세례교인 등이 세운 1887년 정동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최초의 조직교회의 구성원들은 이미 민족교인들에 의하여 개종한 성도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통하여 회심자를 얻게 되는데 1887년 박중상이라는 학생이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이것이 시발이 되어 아펜젤러 선교사는 별도의 장소에서 베델이라는 최초의 한국 감리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내 개신교회의 선교사역이 순탄하게만 흘러간 것이 아니고 반기독교적인 보수-수구세력에  의하여 갈등과 박해를 받게 되는데 1888년부터 일어난 선교사 배척운동과 1894년 평양에서 일어난 기독교도 박해사건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일은 대개 주한 서구 공관들이 조선조정에 항의하고 간섭하는 일로 인하여 무마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해와 어려움을 겪은 신자들은 더욱 신앙의 견고함을 체험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개신교회가 들어온 19세기말은 조선에 보수-수구세력과  진보-개화세력의 첨예한 갈등이 있던 시기이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형성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첨예한 갈등은 1894년 동학혁명을 필두로 1894-5년의 청일전쟁, 1904-5년의 노일전쟁을 불러들여 조선의 국토는 유린당하고 민족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상 피해를 입은 격동의 시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민족의 격동기요, 수난기에 조선 개신교회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조선 장로교회는 1895년 세례교인이 2백여명에서 1896년 이후 2천명 이상으로 급증하여 1906년에는 전국에 1만2천 여명의 세례교인을 얻게 되었고, 조선 감리교회는 1888년 39명이던 세례교인이 1906년에는 남북 감리교 선교회를 통틀어서 전국에 4천여 세례교인을 얻게 된다. 이런 교인수의 증가는 두번의 전쟁으로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영적 도피처로서 교회를 찾은 것에서 원인을 둘 수 있는데 실제로 청일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평양에서는 교회가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것이 평양 주재 서구선교사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심지어 조선주둔 일본군들도 교회를 보호해 주었는데 그것은 조선내 교회가 일종의 외국인 소유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은 모든 것을 뒤엎어 버렸고 그 이후 36년간 민족교회는 가장 탄압과 박해를 많이 받는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