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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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범 작가 문학칼럼] 수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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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었을까. 밤 한 시가 가까워 오는 시각에 나는 TV앞에 앉고 있었다. 술 한 잔 목에 차 오르도록 걸친 후라 곧장 침대로 향했을 법도 한데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눈을 몽롱하게 뜨고 TV앞 거실에 깔아놓은 푸톤에 다리를 죽 펴며 앉고 있었다. 온 사물이 시체처럼 잠든 조용한 이 시각에 아내 역시 잠을 확 쫓아낸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옆에 앉아 TV화면으로 시선을 보낸다. 분명 거기엔 무엇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자정이 지났으니 날짜로 치면 오늘이 수퍼문(Super Moon)이다.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날, 수퍼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하늘에 떠있는 저 달이 지고 내일의 달이 떠오르면 수퍼문이 될 거지만 지금의 달이나 내일 수퍼문이나 그 둘의 크기의 차이는 눈에 거의 띄지 않을 터. 밤이 되면 달을 향해 우우 긴 울음을 남기는 늑대가 보름달이면 기어코 사람으로 변하는 그 전설의 울프맨이 존재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거실의 창문을 뚫고 나타날 것 같은 그런 보름달 밤이어서인가.


간만에 마신 술 때문에 세상은 바람개비 돌듯 빙빙 돌고 있었다. 겨울의 칼바람같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처녀 총각 애간장을 녹이는 춘삼월 바람을 맞은 바람개비처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돌고 있었다. 테니스 동호인들과 술집의 탁자에 둘러앉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작년, 망년회 구실을 붙여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뭐다해서 다들 바빠지기 전에 한 번 모이기로 의견을 모아 테니스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술집에 모였던 때가 나로서는 마지막이었다. 그때가 예수 탄생일 일주일 전이었으니 그럭저럭 세 달은 지난 셈이다. 그동안 다른 테니스 동호인들은 우리끼리 통하는 그 ‘땅콩집’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으나 그때마다 나는 감기로, 허리병으로, 또 다른 이유로 불참했었다.


테니스장에서  간간히 들어오던 그 땅콩집의 실체를 기어이 체험하고자 나는 몸단장부터 했다. 샴푸를 듬뿍 뿌려 땀으로 절은 머리를 헹구고 비누를 잔뜩 칠한 이태리 타월로 살갗이 벗겨져라 몸 구석구석 문질러댔다. 자주 깍아 그리 길지 않은 손톱을 또 깎았고 새 부리처럼 긴 발톱은 깨끗이 빤 양말로 아예 덮어버렸다. 그렇게 찾아나선 땅콩집은 단 한 번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 여기겠지 하고 들어선, 창문에 여러 개의 네온사인들이 불빛을 밝히는 술집은 밴드의 생음악으로 귀가 다 얼얼했다. 아니, 이런 시끄러운 곳에서 술을 마신다 말이야? 술집 문을 들어서는 내게 그런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까짓것 밴드의 음악소리보다 더 크게 목청을 높이면 문제될 것은 없겠다 싶었다. 다들 젊었고 또 테니스로 몸까지 풀었으니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목 푸는 것 쯤이야 누워서 떡먹기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술집 안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세종대왕이 창조한 고귀한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까만 머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내 눈 어디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갔나? 손목에 시계가 걸려있지 않아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었으나 기껏해야 20분 정도 늦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코리안 타임’을 적용한다면 나는 지극히 정시 도착인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오는 술 자리에 20분 정도의 몸 치장은 기본적으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이 오십 둘이면 테니스계에선 거의 퇴물 수준인데, 그 퇴물에서 퀘퀘하게 삶에 찌든 냄새가 나지 않고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난다면 그들은 손을 내젓기보다는 아직은 망령날 나이는 아니라고 손을 벌려 날 반겨주지 않겠는가.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아는 얼굴은 나타나지 않고 밴드의 음악소리만 쿵쾅쿵쾅 내 귀를 때릴 뿐이었다. 뭐 술집은 여기만이 아니니까. 그 술집 건너건너 편에 몰골이 초라한 또 다른 술집이 있었다. 몰골이 초라하다함은 네온사인으로 치장한 그 밴드 소리 요란한 술집과 비교가 된다는 말이다. 마치 영업을 하지 않는 술집처럼 바깥이 어두컴컴했다. 그렇지, 한국 남정네들은 이런 컴컴한 구석을 좋아한다니까. 술집 문을 열기 전부터 나는 그곳이 바로 땅콩집이란 것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까만 머리들이 사각형으로 둘러앉은 식탁에서 나는 드디어 길고 통통한 알루미늄 은색 배스킷을 볼 수 있었다. 크기가 만만치 않은 그 배스킷에 땅콩이 껍질에 싸인 채로 철철 넘쳐나고 있었다. 열 명의 장정들이 까먹고, 또 까먹고, 손이 아프도록 까먹어도 도대체가 없어질 것 같지 않을 양의 땅콩이었다. 우리가 테니스장에서 땅콩집, 땅콩집이라고 노래하듯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엄청난 양의 땅콩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땅콩때문에라도 술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모처럼만에 내 곁에 들러앉은 반가운 얼굴들이 내 술 맛을 한껏 돋궈 주었다. 여기저기 쨍, 쨍 부딪히는 술잔 속에서 점점 풀려가는 내 눈이 바라보는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물결치듯 흔들려가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You are free to go.)”

“그것이 다인가요? (Is that it?)”

“그렇습니다. 그게 다지요. (Yes, that’s it.)”


 10년 가까운 세월을 사방이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보낸 죄수에게 안경이 코 끝까지 내려앉은 판사가 넌 죄가 없어. 그러니까 그만 나가봐, 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이었다. 까먹고 또 까먹어도 여전히 산더미같았던 땅콩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시간이 좀 지났다고는 하나 모처럼 들이킨 술 기운은 조금도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집에서 맥주캔을 따기까지 했으니. 술집에서 바라보던 세상처럼 집 안의 모든 것은 돌고 있었고 그래서 영화 속 모든 것들도 빙빙 돌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차량으로 붐비는 거리가, 어둠이 깔린 골목길이, 높고 낮은 건물들이 바람개비 돌듯 빙빙 돌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었을까.


“그게 다 입니까 (Is that it)?” 그 장면을 포착하기 전까지 내가 대충 파악한 영화의 내용은 정말 대충 이런 것이었다. 베티와 케니라는 이름이 자주 내 귀로 들어온 걸로 봐서 영화의 주인공은 베티와 케디였다. 베티는 여동생, 케니는 오빠. 그러니까 둘은 오누이. 살인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케니는 감옥에서 몇 년 간은 잘도 버티었다. 그건 순전히 희망 때문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곧 밝혀질 거고 그러면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은 떠오르는 태양에 안개 걷히 듯 사라질 거라는 희망. 그러나 사라진 것은 누명이 아니고 희망이었다. 영화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해야한다고 법을 만들었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법이 완전할 리 없고 불완전한 인간이 그 법을 집행까지 하니 공평하게 적용될 리 없다. 어떤 누구는 반드시 불이익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 그 불이익을 시정할 줄도 안다. 그러니 제발 어떤 상황에서라도, 무슨 바람이 불어 닥치던, 우리 희망을 잃지 말기로 하자.


폭우가 쏟아지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세월의 풍화작용에 견디지 못한 케니의 희망은 해가 거듭되면서 그 형태가 점차 불분명해지더니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희망이 사라진 케니의 삶은 어둠 그 자체였다. 눈이 궹해진 케니는 어둠 속에서 그 궹한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또 그 궹한 눈을 감았다. 


“유능한 변호사를 알아볼께. 오빤 반드시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될거야.”


면회를 온  베티에게 케니는 피곤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고 귀찮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역정까지냈다.


“니가 무슨 수로 그런 변호사를 찾아? 내가 이곳에서 썩어가도록 그냥 냅둬.”


그러나 베티는  포기하지 않고 마이더스의 손처럼 모든 사물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능력의 변호사를 찾아보지만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살인의 죄목이 빗겨간 오 제이 심슨처럼 주체할 수 없는 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참담한 현실도 베티를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베티는 자신이 마이더스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전개되어가는 영화의 제목은 컨빅션(Conviction)이다. 

술 기운으로 빙빙 도는 화면 속에서도 눈을 감고 잠을 청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눈을 화면에 붙들어 매고 있었던 것은 희망을 잃고 살아가기 쉬운 이 각박한 세상에서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케니가 잃어버린 그 희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영화는 해피엔딩이었다. 나약한 여인, 온갖 역경을 이겨낸 베티는 여동생으로서가 아닌 변호사로서 사형을 언도받은 오빠에게 다시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내 한 몸 희생해서라도 오빠를 그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말거야. 그녀는 그렇게 다짐을 했던 것이고 그 다짐은 케니가 그 어둡고 깊은 늪을 빠져나오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베티와 케니를 연결하는 그 끈은 가족을 묶어주고 친구를 묶어주는 우리 일상의 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고 또 우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험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그다지 많은 끈은 필요치 않다. 어쩌면 단 하나로 충분할 지도 모른다. 베티처럼 단 하나의 헌신적 사랑.   


“그게 다 입니까(Is that it)?”


나무 망치를 탕탕 내려치며 자유의 몸임을 선언하는 판사를 향해 던진 케니의 말은 그렇게 엉뚱했다. 십 여년을 감방에서 썩게 했으면 적어도 미안합니다,라는 말 정도는 해야되지 않는가 하는 케니의 표정. 그러나 영화 속 그 어디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영화니까. 그런 말을 하면 영화는 삼류로 전락하며 유치해지니까.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대신 했다. 여전히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화면에다 대고, 겨우 겨우 유지하고 있던 무거워진 눈꺼풀을 아래로 슬며시 내리며 그 긴 세월을 어둠 속에서 버틴 케니에게 내가 한마디 했다. 미안해요, 증말.


눈동자를  덮은 무거운 눈꺼풀은 한번 내려가더니  쉬 올라오지 않는다. 영화는 이제 끝 부분 몇 장면만 남겨놓은 상태라 더 이상 눈을 뜰 필요도 없었다. 푸톤에 누운 아내는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아내를 쳐다보는 내 머리 속으로 베티, 희생, 사랑, 그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내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사랑한다면서 아내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가슴이 뜨끔해진다. 누군가의 시에서처럼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꺽어 나의 곁에 두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주어야 할 것을.


20년에서 1년 모자라는19년 만에 찾아온 수퍼문. 이 늦은 시각에 술까지 취한 나를 TV앞에 앉게 한 것은 아마도 이 수퍼문이 아니었을까. 내일 밤 수퍼문을 두 눈에 담으며 이제 내가 한 번 베티가 되어보라고. 내 가슴에, 지친 새 쉬고 갈 작은 보금자리 하나 만들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