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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환 목사 기독칼럼] 미주한인교회 형성 이야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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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을 기점으로  하와이와 미본토에 이민온 한인이민자의 인구파악은 각 시대 미주한인사회와 한인교회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65회의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온 한인이민자들은 대략 7400명으로 집계되었고 이민이 금지된 1905년부터 1910년 사이 한인이 미국에 온 수자는 222명에 불과한 것으로 미 이민국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유의영.미주 한인의 인구학적 특성). 이것은 1910년 이전의 미주내 한인인구가 총 7790명인 것으로 이 시대 한인사회의 규모파악의 기초가 되는 자료이다. 1920년대 하와이  한인인구는 약 5천여명인 것으로 미  인구센서스는 밝히고 있고 이 중  대략 2천여명의 하와이 한인이 본토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한다. 아시아인 이민이 금지된 시기인 1930년대와 1940년대중 1930년대는 하와이 한인이 6천여명 본토에 2천여명, 총 8천여명이 집계되었고 1940년대는 하와이와 본토를 합하여 8천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1910년대로부터 해방년인 1945년까지 미주내 한인인구가 8천여명 선에서 고정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1940년대까지  미주한인 이민자들의 주된 거점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주였다. 이것은 한인사회와 교회의 주된 활동무대가 바로 이 두 곳에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유의영 교수는 말한다. 그리고 1950년대도 미주 한인 1만명 중 70%는 하와이에 살았고 본토에는 30%의  한인이민자가 살았는데 이들의 대다수가 캘리포니아에 집중되었다.  


1945년 이전의  미주 본토에 설립된 주요 초창기 한인교회들로는 이미 언급한대로 1903년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 1904년 상항 한인감리교회, 1906년 나성 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 등이 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설립되었고 한인들이 점차 동부지역으로도 이동함으로써 1919년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 한인감리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상항 한인감리교회와 관련하여 특기사항은 1904년 안창호에 의하여 설립된 친목회가 근간이 되어 재 상항 한인가정에서의 순회예배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05년에는 한인전도회를 조직하고 문경호전도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10년 이전까지는 방화중, 양주삼 등의 전도사가 목회일을 보았고 1911년 이대위 목사가 정식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일로 이 교회는 감리교단에서 정식 교회로 승격되었다. 우리는 이미 양주삼 전도사의 재직시 장명환, 전명운 두 애국의사가 스티븐즈를 저격한 것을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당대 언론기관인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이 저격사건이 사전에 한인감리교회에서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고 살인을 계획한 것’으로 묘사될 정도로 한인교회가 고국의 독립운동에 매우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게된다.   

1906년 미 본토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한인장로교회인 나성 한인장로교회는 상항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던 방화중과 당대 한국에서 평양신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던 마포삼열 목사의 회동에서 비롯된다. 이 두사람의 회동은 나성에서 한인장로교회를 설립하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고 미 북장로교회 나성노회의 허락을 받아 A.B. Pritchard 목사의 인도하에 한인 장로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1906년 5월 10일 첫 예배를 한인장로교 미션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동 교회는 방화중 전도사와 민찬호 전도사에 의하여 초창기에 운영되었다가 1929년 김중수 목사의 부임과 더불어 완전한 자치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도 잠시 목회를 했던 방화중 전도사는 6년간 나성장로교회를 섬겼는데 그는 평양출신으로 하와이를 거쳐 본토로 왔고 나성 한인장로교회를 섬길 때 동시에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들에 대한 원조사업에도 관여하였다. 1912년 부친상을 당하여 잠시 귀국하였던 방화중 전도사는 다시 나성으로 돌아왔으나 평신도로서 교회를 돕다가 1939년 소천하였다. 

방화중 전도사에 이어 나성한인 장로교회를 도운 이로는 민찬호 전도사가 있는데 그는 먼저 하와이에 도착하여 하와이 한인교회를 돕다가 1911년 나성에 도착하였고 로스엔젤레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동 교회를 돕게 되었다. 그는 1912년 신학수업을 마치고 다시 남가주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16년 졸업하였으며 1919년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하와이로 돌아가 해외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신한민보에 의하면 이 때 나성에 있던 한인교포는 100여명이었고 동 장로교회를 출석한 교인은 장년이 40여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초창기 미주 한인사회가 매우 교회중심이었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미주한인교회는 당대 한인사회의 영적 구심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