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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환 목사 기독칼럼] 미주한인교회 형성 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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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한민족 해방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만 아니라  구원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 구성원들 중에는 하나님과 신앙의 언약을 맺고 그 신성한 언약을 목숨걸고 지킨 신실한 신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세계 열강을 움직여 한민족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각 시대 각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신앙의 언약을 맺은 신자들의 공동체는 그 시대의 중심이며 민족과 열방을 위한 축복의 통로라고 할 것이다. 


1945년은 한민족이 만주에서 서양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해인 1879년을 기점으로 66년이 되는 해로서 1910년 이후 한일합방기간 한민족교회는 고국과 해외에서 민족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고 독립자금 갹출의 재원이기도 하였다.

이 기간 하와이와  미 본토에서 살던 재미한인들은 비록 거창한 기업은 이루지 못하였다 해도 독립운동과 자녀교육이 곧 그들의 기업이었다. 

1940년대 하와이의 경우 이민 1세들은 태반이 죽고  2세들은 주로 도시에서 거주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래서 교회들은 거의 폐쇄되고 소수만이 영어중심의 다인종교회로 잔존하게 되었다.  

1943년 남가주에서는 김창순 이창의 제씨의 주도로 <한미문화  협회>가 결성되어 재미 한인사회의 문화 예술 진흥의 구심이 되는데 특기할 것은 물리과학자 알버트 아인스타인 박사가 동 협회 장학기금분과 명예위원장으로 위촉되어 협력한 것으로서 동 협회는 1943년 하와이대학 안에 한국도서실을 설치하게 된다.


1941년 일어난 태평양 전쟁시 하와이 한인 2세들중 8백여명이 미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그중에 이백여명은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 중 미군 442연대 100대대에  배속되었던 김영옥 대령은 가장 훈장을  많이 받았던 우리의 자랑스런 한인장교였다. 조국의 해방후 1948년까지 지속된 남한에 대한 미군정 기간 하와이의 한인들이 미군장교로 복무하게 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정남역 박사와 허버트 최 판사 등이었던 걸로 이덕희는 기술한다. 이때 조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던 하와이 출신 한인 2세들이 한국의 신부들과 결혼하고 하와이로 데리고 왔다. 

1919년 이후 결성된 <대한부인구제회>는 1947년 그 당시 한국 초대내각중 여성장관이었던 임영신 여사가 학교를 설립하고자 할 때 7천여불을 학교설립기금으로 희사한 일도 있다. 그리고 1950년부터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 당시 태평양전쟁 때 보다 더 많은 하와이의 한인 2세들이 참전하였고 이 기간 대한 부인구제회와 여러 한인교회들은 구호품을 모집하여 미군을 통해 고국에 보내는 일도 하였다. 

1913년부터 시작된 태평양 잡지는 동지회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1959년부터는 태평양주로라는 제명으로 김창원씨가 주필을 맡아 발간되어 오다가 1970년 폐간되었으며 1954년부터는 하와이대학 내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고 이동진 목사 백준명 강사 이동재 교수 제씨 등이 맡아 강의를 이끌어 왔다. 


한편 1960년대에 남가주일대에 대략 4천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는 상황에서 가장 기억할 한인으로는  김호씨와 송철씨가 있다.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성학교에서 후진양성을 돕다가 1912년 국외로 망명하여 1914년 미국 상항으로 온 김호씨는 역시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한인 국민회 회원으로 봉사하였는데 미주 지역 한인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만여불의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기탁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1920년 중가주 리들리로 이주하고 김형순씨와 함께 <김부라더스 회사>를 세우고 농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거기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는 1919년 리들리에 세워진 한인감리교회의 주동자였고 고국에서 신사참배문제가 불거지자 감리교회를 장로교회로 개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국민회를 1937년 재건하여 북미 대한인 국민회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본부를 로스엔젤레스로 옮기고 국민회관 신축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초대 중앙집회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가운데 1941년 하와이에서 결성된 <해외  한민족 연합회>의 나성 집행위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또한 한일합방 32주년이 되는 1942년 로스엔젤레스시가 시청에서 태극기 게양을 허락하게 함으로써 한국이 독립국가인 것을 천명하는 의식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해방후 잠시 고국으로 가서 과도기 입법의원으로 활동도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와 1957년 한인재단을 설립하고 유학생을 위한 장학사업을 벌였고 1959년에는 김원용씨에게 부탁하여 소중한 이민역사 자료인 <재미한인 50년사>를 발간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