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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불임의 땅 '노다지'를 잉태하다-빈민가에서 살다 간 "아리조나의 아버지" 포우스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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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첼맨 소령의 주선으로 재력가를 소개받은 포우스턴은 1856년 3월24일 자본금 200만 달러의 Sonora Exploring and Mining Co.를 설립하고 사장에는 하인첼맨, 포우스턴은 광산 총감독에 선임되었다. 자본금 200만 달러는 하인첼맨 이름으로 신탁되어 채광이 성공했을 경우에만 인출되도록했다.

포우스턴은 텍사스의 샌 안토니오를 방문, 겁없는 거친 젊은이들을 모집한 후 이들과 함께 미국 영토가 된 아리조나 중남부의 작은 마을 투박에 회사를 차렸다. 소노라 광산회사가 처음 손을 댄 곳은 Oro Blanco에서 북동쪽으로 15마일 지점, Cerro Colorado의 산자락에서 발견된 은광. 광산의 이름은 하인첼맨을 기념하여 “하인첼맨 은광”이라고 지었다. 소노라 광산회사는 연이어 산타 리타와 파타고니아 산 동쪽에서 은광을 찾아냈다. 이들은 옛날 스페인과 멕시칸들이 개발하다 포기한 광산을 재정비하고 추가로 개발하여 새로이 광맥을 찾아냈다. 포우스턴의 소노라 광산회사는 일찌기 멕시코 정부가 불하한 알타 계곡의 Arivaca와 산타 크루즈의 Sopori 땅을 매입한후 뉴 멕시코 주의 정식 허가를 받고 광산을 개발했다.


광산주변 인프라  시설 미비로 고전

포우스턴의 연이은 소노라 광산회사 은광개발 소식은 지역 신문을 뜨겁게 달구었다. 1857년 정식으로 채굴을 시작하자 모두들 경이적인 눈으로 이들 광산을 주시했다. 그러나 채광사업은 용이하지 않았다. 자본금과 노동력이 부족하고 여름철의 살인적인 더위와 건조한 날씨, 그리고 용수부족은 치명적이었다. 또한 가까운 곳에 고급 광석이나 복잡한 광석을 다룰 제련소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를 기억하는 투산의 한 시민은 이후 포우스턴의 회사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악조건을 견뎌냈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가까운 철도역 이래야 광산에서 1,200 마일 거리인 텍사스의 Texarkana 였다. 광산의 중장비나 자재, 그리고 광부들의 부식은 동부에서 실려 서부 마지막 역인 이곳에서 하차된다. 이 화물은 파운드 당 20센트의 금화로 계산되어 마차나 황소가 끄는 소달구지, 그리고 노새 등에 실려 장장 1,200 마일 거리를 가야했다. 가는 도중 이들은  아파치나 멕시코 산적과도 한판 붙어야했다. 320 마일 거리의 멕시코 Guaymas 항구에서 화물선은 Cape Horn을 돌아 영국 Wales의 Swansea로 향했다.”


산타 크루즈 강변에 군 요새 설치하여 아파치를 억제

미 연방정부도 새로 편입된 미국 영토에 광산이 개발되고 정착민이 늘어나자 산타 크루즈 강 주위에 군의 요새를 설치하고 정착민을 보호했다. 산타 크루즈 강을 중심으로 노갈리스 북쪽 칼라바사스에는 ‘무어 기지’를, 그리고 오늘날 소노이타 근방에는 부캐넌 요새를 설치하자 아파치들의 난동이 어느 정도 억제되고 정착민은 서서히 늘어났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포우스턴의 광산은 하루 3,000여 달러의 생산고를 올렸다. 그러나 요새에 주둔하던 푸른 제복의 북군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그리고 말에 대포를 매달고 전선으로 떠나자 산마루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파치들은 자신들이 북군을 물리쳤다고 착각했다. 움추리고 있던 산에서 튀어나온 아파치나 멕시코 산적들은 백인들의 정착지를 무차별 약탈하고 살인했다. 포우스턴의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모두 일터를 버리고 도망쳤다. 포우스턴의 동생 John Poston도 두 명의 멕시칸 직원과 함께 산적에게 살해당했다.


요새병력 전선으로 이동하자 아파치 산적 무차별 공격

1865년 남북전쟁이 막을 내리고 요새에 군부대가 진주하면서 아파치들의 준동도 시들해지자 그간 멈추었던 광산에 다시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은값이 치솟자 광산은 다시 옛 영화를 찾았다. 사각지대였던 중남부 아리조나에 우편업무가 시작되고 화물운송도 노새부대에서 포장마차로 대치할 만큼 도로사정도 좋아지자 광산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 광산이 활기롭게 운영될 때 광산 근방에는 800여 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이 모여들어 제법 큰 마을이 생겨났다. 포우스턴은 ‘대령’이라고 불리우며 뉴 멕시코의 연방영토 주정부도 공인한 마을 주민의 재판관 겸 촌장 격인 “Alcalde”가 되었다. ‘법보다는 사랑이 우선’ 이라는 신념에 따라 포우스턴은 마을 주민을 위해 헌신했다.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이곳 마을에서 포우스턴은 태어나는 광부들의 어린 아이에게 영세를 베푸는가 하면 결혼도 주례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혼도 허가했다. 그의 이 같은 처사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광산촌 마을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도 만들어 

또한 포우스톤은 마을에서만 사용하는 화폐도 발행했다. 글을 모르는 광부들이 화폐단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두꺼운 종이에 각종 동물을 인쇄하여 금액을 구별하게했다. Boleta라고 불리운 이 돈은  돼지가 인쇄된 것은 12.5 센트, 송아지는 25 센트, 수탁은 50 센트, 말은 1달러, 숫소는 5 달러, 사자는 10 달러였다. 글을 전혀 모르는 멕시칸 광부들은 말이나 숫소, 그리고 사자가 얼마나 귀한 돈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광산촌 주민들의 양식이나 기타 필수품은 주로 소노라에서, 그리고 신선한 야채나 과일은 투마카코리에서 광산과 계약을 맺은 운송업자가 공급했다. 포우스턴의 주 고객중 하나가 이후 템피에서 도선업과 제분업으로 거부가 된 Charles Trumbull Hayden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포우스턴의 일상은 그런대로 평온했다. 이따금 나타나는 아파치가 없을 때면 산타 크루즈 강 한 편에 물을 막아놓고 몸을 담그고 책도 읽고 신문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가 광산촌 주민에게 영세를 주고 혼인을 주례한다는 소문이 가톨릭 산타 페이 교구까지 전해졌다. 놀란 교구에서는 Joseph Machebeuf 신부를 보내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Joseph신부는 포우스턴이 그간 베푼 종교적인 의식을 모두 무효화 했다. 신부의 처사에 실망한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포우스턴과 신부는 서로 양보하기로 했다. 포우스턴이 700 달러를 기부하면 그 돈으로 무효화한 결혼식과 어린이 영세식을 다시 갖고 축하무도회를 화려하게 베푼다는 것이다. 포우스턴의 700 달러 기부로 광산촌은 화려한 무도회로 밤이가는 줄 몰랐다. 


아리조나 영토 독립에 헌신하는 포우스턴

남북 전쟁으로 회사가 있는 투박 일대를 아파치가 장악하자 포우스턴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인첼맨이 있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포우스턴이 마차로 워싱톤에 도착한 밤거리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선 하인첼맨의 민간인 보좌관이 된 포우스턴은 하인첼맨의 소개로 링컨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과 의회를 상대로 새로 미국 영토로 편입된 지역이 얼마나 많은 광물이 있는가 설명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개발하려면 이 지역이 독립된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포우스턴은 또한 하인첼맨과 함께 퇴임을 앞둔 의회 의원들에게 새로 생기는 자리를 보장하고  설득하여 법안을 원만하게 통과시켰다. 포우스턴은 링컨 대통령이 사용할 잉크병을 아리조나에서 캐낸 은으로 1,500 달러를 들여 티파니 보석상에 제작하도록 했다. 1863년 아리조나의 초대 인디안 감독관에 임명되고 1864년에는 미 연방 하원의 아리조나주 파견대의원에 선임되었으나 1865년 파견대의원 재선에서 초대 주지사 John Noble Goodwin에게 패한다. 이후 포우스턴은 아리조나 초대 입법의원, 하원의장등 여러가지 공직에 봉사한다. 아리조나에 대한 그의 이러한 헌신을 기려 1899년 아리조나 연방영토의회는 그를 “아리조나의 아버지”로 결의했다. 포우스턴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다. 이집트 여행시 배화교 신자가 된 그는 프로렌스의 토지국에 근무하면서 주택 근방에 피라미드 모양의 배화교 사당을 만들고 이름도 배화교 성지를 따라 “Parsee Hill (장미언덕)”이라고 불렀다. 이후 포우스톤은 생계를 위해 철도나 광산 발기인, 토지측량국 종업원을 전전했다. 또한 포우스턴은 소노라 광산회사 소유 토지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주장했으나 재판에서 패소했다. 또한 그의 스폰서 하인첼맨 장군도 1880년 사망했다.

1897년 Whitelaw Reid가 빈민가에서 어렵게 사는 포우스턴의 근황을 언론에 보도했다. 아리조나 연방영토의회는 1899년 그에게 매월 25 달러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의하고 1901년에는 매월 35 달러로 10 달러를 인상했다. 1902년 6월24일 포우스턴은 피닉스의 빈민가에서 외롭게 이승을 하직하고 매장되었다. 포우스톤의 유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25년 4월20일 아리조나의 프로렌스에 있는 그가 세운 배화교 사당이 있는 “장미언덕”, 일명 “포우스턴의 외딴 산”에 이장되었다. 그의 이장식은 당시 주지사 George W.Hunt가 집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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