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불임의 땅 '노다지'를 잉태하다-불꽃처럼 살다, 변방의 개척자 '모우리 중위'(상)

낮게 늘어선 황갈색 흙벽돌 집 사이로 길게 뻗은 대로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너른 길 에는 이따금 대륙의 후끈한 열풍이 뿌연 먼지를 몰고 빠져나간다. 1859년 7월8일, 오늘의 아리조나 중남부의 작은 촌락 ‘투박’의 하이 눈-정오. 길 양편에 늘어선 주민들은 백주의 대로에 마주 선 두 신사를 마른 침을 삼키며 보고있다. 두 사람간의 거리는 고작 40 발자욱. 모두 번사이드 회사 제품인 칼빈 소총을 들고있다. 두 발의 총성에 이어 계속해서 4발의 총성이 작은 촌락을 울렸다. 더위에 시든 덤불 속에서 더위를 식히던 멧새, 들새들이 놀라 푸드득 하늘로 향했다.
총성이 멎었어도 두사람은 무사했다. 결투를 제안한 Sylvester Mowrey 미 육군 중위와 위클리 아리조나 신문의 Edward Cross 기자는 모두 무기를 내리고 상대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눈 후 함께 걸어나갔다. 실제 크로스가 모우리를 향해 정조준을 하지않은 채 사격을 하자 모우리도 결투를 중단한 것이다. 지켜보던 주민의 박수를 받으며 두 신사는 측근들과 함께 길가 술집으로 들어가 고급위스키 42 갤론을 마셔버렸다. 물론 관심있게 결투를지켜 본 주민도 자리를 함께하고.
백주의 하늘에 울려퍼진 결투의 총소리
육군 중위 실버스타 모우리는 그의 튀는 행각과 사업추진력으로 항상 그의 주위에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과 시기하는 적을 두었다. 백주의 정오, ‘하이 눈’에 벌어진 결투도 실은 모우리의 튀는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뉴 멕시코 주에서 아리조나를 분리하여 독립된 주를 만들자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활동하던 모우리는 거주민의 수나 지하자원 등 여러가지 사항을 약간 부풀려 인용했다. 위클리 아리조나의 크로스 기자는 이를 불법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모우리를 개인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트집 잡았다. 불같이 화가 난 모우리는 크로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조건은 두 사람간 거리를 40보로 하고 번사이드 회사의 칼빈 소총으로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투는 이처럼 무승부로 끝났다.
실버스타 모우리는 아리조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포우스턴과 함께 아리조나를 독립.분리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그의 튀는 성격과 친 남부 인사로 분류되어 그의 헌신은 빛을 잃은 “불꽃처럼 살다간 비운의 사나이”이다.
불꽃처럼 화려한 사나이 실버스타 모우리는 1830년 10월16일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났다. 1848년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852년 졸업한 모우리는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특히 라틴어에 능했다. 졸업과 함께 서부 연안에 배속된 모우리는1854 년 콜럼비아 강 근방의 태평양 철도회사 노선 조사단을 지원하며 변방을 누빈다. 이후 모우리는 유타에서 임시중령 Edward J. Steptoe의 부대에서 복무하다 1855년 Steptoe와 함께 유마로 전속된다. 모우리는 유마 요새에서 지역을 순찰하며 아리조나의 무한한 지하자원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일설에는 모우리가 유타에서 복무중 유부녀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좌천 되었다고도 한다.)
1857년 초 모우리는 George F. Hooper, Francis Hinton그리고 Richard Halstead와 함께 힐라 강 근방의 구리광산 개발에 관여했다.
코로라도강 유역 순찰하며 지하자원에 눈떠
Gadsden Purchase 당시 아리조나 라는 지역은 멕시코와 경계를 이룬 힐라 강 남쪽에서부터 콜로라도 강과 리오 그란디 강 사이를 의미했다. 1856년 당시 정착촌 이라고는 투산과 투박 사이, 그리고 리오 그란디의 메실라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힐라 강 근방에서 금광이 터지자 1858년 현재의 유마인 코로라도 시티는 세 번째 정착지가 되었다.
1856년 8월 투산에서는 주민회를 열고 뉴 멕시코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주를 만들 것을 결의하고 이를 워싱톤에 청원하기로 했다. 이 청원서를 전달 할 대의원으로 사업상 워싱톤을 방문할 예정인 토목기사 Nathan P. Cook을 선임했다. 그에게는 별도의 출장비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Cook은 출장 길에 유마 요새를 방문했다. 젊고 야심만만한 모우리는 년내에 Cook의 자리를 차지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당시 미국 영토가 된 변방에는 특별한 정부기관이 없었다. 더구나 선거를 주관하는 기관도 물론 없었다. 누구든 어느 자리가 탐이나면 가까운 친지와 상의한 후 친지들이 추천하고 선거일을 잡으면 그만이었다. 모우리가 탐내는 대의원 자리는 모든 경비를 자비로 해결하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1857년5월 대의원에 선임되어 동부로 간 모우리 중위는 ‘왜 아리조나는 시급히 뉴 멕시코에서 분리되어야 하는가’ 를 알리는 팸프렛을 제작하여 유력 정치인과 언론기관, 재력가에게 돌렸다. 모우리는 “미합중국 육군 중위 실버스타 모우리가 미 합중국 캘리포니아 노선 우편업무계약자 오버랜드 우편회사에게” 라는 제목의 팸프렛에서 “아리조나 라는 새 영토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캘리포니아까지 우편노선이 절대 필요하고 새 영토의 무한한 자원개발과 농업, 목축업을 위해 하루 빨리 분리 독립된 영토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조나 독립을 위해 정.재계,언론을 설득
의회지도자들과 언론은 변방에서 날아온 풋나기 육군중위의 활동을 주목하고 비중있게 다루었다.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William Gwin 부부는 모우리를 무도회에 초대했다. 무도회에 입장하는 모우리를 호명하자 모우리는 ‘수천 달러’의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중세풍의 까만 벨벳에 하얀 공단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입장하여 장내를 압도했다. (무도회 도중 가슴에 단 500 달러 상당의 다이아가 바닥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시종이 찾아주었다.) 이 처럼 그의 튀는 성격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모우리는 두 차례 대의원에 피선되었으며 상원의원 Gwin과 함께 아리조나의 연방영토 법안을 기초하고 신대륙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하도록 언론에 소개했다.
캘리포니아의 Buchanan 요새에서 복무하던 모우리 중위는 1858년 7월31일 제대했다. 모우리는 1860년 James Buchanan 대통령에 의해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경계를 확정하는 국경조정위원에 선임되었다. 모우리는 이 업무를 통해 광산과 탐광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1860년 4월 투산에서 75마일 떨어진 파타고니아 산 남쪽 9마일 지점 420에이커를 25,000달러에 매입했다. 이곳에는 1850년대 초 예수회 신부들과 멕시칸들이 은광을 개발하다 중단한 곳이다. 1859년 경부터Titus 대령과 Brevoort 가 공동운영하던 광산이다. 모우리는 고급선원인 형 Charles를 불러 광산 관리 책임을 맡겼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파타고니아 은광을 25,000달러에 매입
인수한 광산의 관리를 형에게 맡기고 국경조정업무를 계속하던 모우리는 1861년 1월 내내 파타고니아의 광산에 머물면서 여러 지방을 방문하고 친지들을 접촉했다. 이미 친 남부인사로 알려진 그의 동정은 언론의 추적을 당했다. 특히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그의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다루었다. 2월말 모우리가 메실라 주민 Samuel J. Jones와 공개리에 회동하자 투산의 한 시민은 3월20일자 뉴욕 데일리에 “이 공모자들은 자신들의 마땅한 도구로 Cobb Floyd, Davis, Slidell을 음모에 끌어들였다. 이 가증스러운 투기꾼은 국유지를 자신의 개인영지로 사용하는 엉터리 연방대의원이었다.”라고 모우리를 비난하는 글을 투고했다. 모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로 다음해 봄 국경조정위원직에서 해임된다.
모우리는 멕시코의 Guaymas항을 방문했다.모우리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어떻게 이 항구를 발전시키고 미국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연구한다는것. 모우리는 다시 파타고니아 광산으로 돌아와 광산 이름을 “모우리 광산”이라고 바꾸고 광산 근방에 있는 사저를 아파치들의 약탈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요새화한다. 그의 형 Charles는 모우리가 도착하기 직전 동부로 떠났다.
몇달 후 Mazatlan에 있는 샌 프란시스코 “뷰리틴” 신문의 통신원은 모우리가 이곳 친 남부연맹 인사들과 민간 무장선박인 사략선을 구입하려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통신원은 자신이 이 사실을 추적하자 모우리가 서둘러 Guaymas 를 떠나 파타고니아 광산으로 떠났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 기자는 모우리와 함께 승선했던 승객이 “모우리가 자신에게 남부연맹을 계속 찬양했다.”는 말까지 취재하여 보도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