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타임즈
칼럼
KAZT 어드민
KAZT 어드민

[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불임의 땅 '노다지'를 잉태하다-불꽃처럼 살다, 변방의 개척자 '모우리 중위'(하)

new1.jpg


북군의 Carleton 장군이 이끄는 캘리포니아 민병대가 유마를 출발하여 투산으로 진격하자 잠시 투산을 점거했던 남군의 Hunter 대위는 재빨리 투산을 포기했다. 투산에는 남군이 입성하기전 친 남부연맹 인사를 중심으로 자체방위대와 식량등 필수품을 수송할 보급로를 확보한 상태였다. 1862년 6월7일 오후 캘리포니아 민병대의 Emil Flitz 대위는  기병대를 이끌고 투산을 완전 포위한 후 남군에 협조한 인사를 구금했다. 장교로  구성된 조사단은 구금된 인사들의 경력, 정치적 성향, 직업 등을 조사한 후 대부분의 인사는 석방되었다. 어떤 상인 두사람은 미합중국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마친 후 석방되었고 죄질이 나쁜  9명은 유마의 군 기지로 이송되었다.


투산 점령 후 모우리 체포에 나선 북군

캘리포니아 민병대의 칼튼 장군은 민병대를 이끌고 유마를 향해 출발할 때부터 모우리의 친 남부 활동을 언론을 통해 알고 있었다. 칼튼 장군은 투산에 도착하자 마자 한 때 모우리의 광산에서 일한 광산 기술자 Schuner가 “모우리는  남군의 헌터 대위에게 화약을 팔은 반역자”라고 써서 보낸 편지를 받는다. 6월8일 칼튼은 Edward E. Eyre 중령에게 모우리를 구속할 것을 지시했다. 다시  Eyre 중령의 명령을 받은 Flitz 대위는  기병 60명을, Edward B. Willis는  보병 20명을 인솔하고 모우리를 체포하려 12일 오후 모우리 광산으로 향했다.

Eyre 중령은 장병들이 출발하기 전 칼튼의 다음과 같은 명령 즉 “모우리의 사무실이나 사저에서 발견되는 문서는 무엇이건 수거하고 건물 내에 있는 인사도 무조건 사령부로 연행하라. 연행 중 저항하는 자는 상황을 판단하여 적절히 대처하라.”를 낭독했다. 이후 모우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날 칼튼은 나를 구속하기 위해 128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나와 나의 초대손님 Paulin Robinson과 그 외 21 명을 포로로 잡아  사령부로 압송했다고 썼다.

Eyre 중령은 체포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는 12일 오후 광산에서 6마일 거리 밖에 대포를 은닉했다. 13일 새벽 1시, 마른 강바닥을 따라 우리는 컴미션이라고 부르는 모우리의 거처 400 마일 근방까지 다가갔다. 나는 Flitz 대위에게 30명의 병사를 이끌고 컴미션을 포위하도록 한 후 만약 문서를 발견할 경우 수거하고 눈에 띄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나머지 병사들을 인솔하여 짐승 우리가 딸린 모우리의 저택을 완전 포위했다. 새벽 3시경, 나는 문이 굳게 잠긴 저택의 출입문을 발견했다. 문을 거칠게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나는 Willis 대위와 병사 20명을 이끌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야간 보초인 듯한 경비에게 ‘모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으니 그는 모우리의 침실 문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거실문을 두드리자 모우리가 잠옷을 걸친 채 나타났다. 자신을 연행하러 온 우리를 향해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초대로 온 손님은 광산을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받은 명령은 광산에 있던 누구든 사령부로 연행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거절했다.


잠자던 모우리와 초대손님을 사령부로 연행

나는 Willis 대위에게 병사들과 함께 광산을 지키도록 하고 6월16일 모우리를 포함한 포로들을 모두 사령부로 연행했다. 어느 신문사 기자는 16일자 우편소인이 찍힌 편지에서 “모우리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차가운 모습으로 그를 시중드는 여인들과 개인비서를 대동하고 연행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의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군인들의 처우로 고칠 수있다고 본다.”라고 했다. 

칼튼 장군은  모우리등 반역자를 수사할 조사단을 구성하고 자신은 보급품을 확인하러 피마 촌락에 있는 Barrett 요새로 갔다. 조사단은 모우리의 범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증거를 확보하는데 대배심원 제도처럼 운용했다. 조사단은  모우리가 남부군에 탄약을 판매한 사실을 증거로 몇 사람을 구속했으나 이를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이 사실은 모우리가 이미 “아파치를 퇴치해 달라고 탄약을  팔았다.”고 순순히 시인했기 때문이다. 실제 군 조사 요원들이 모우리의 반역 여부를 가리는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한 몇 통의 편지를 통해서이다. Eyre 중령은 모우리의 거실에서 모우리가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오늘의 아리조나 군정 지사로 자임했던 남군의 Baylor 장군에게 보낸 1861년도 10월 24일자 편지 초안, 남부연맹의 Jefferson Davis 대통령과 교신한 1861년도 12월 11일자 편지, 그리고 1861년 12월24일자 남군의 Sibley 장군과 주고받은 편지를 압수했다. 조사단은 편지를 검토한 끝에 그의 자유를 제한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고 군사 법정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조사단장겸 투산 수비대장인 Joseph R. West 대령은 1862년 6월20일 이 사실을 모우리에게 통고했다. 모우리는 즉시 가석방으로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청원은 Eyre와 칼튼에 의해 기각되었다. 그러나 모우리는 계속 “…나의 광산은 현재 운영상 곤경에 처해있다. 조금이라도 광산운영에 경험이 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하니 나를 구금하는 것 보다는 석방시켜 조금이라도 결손을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탄원했다.


모우리의 가석방 요청에 북군은 계속 거부

모우리는 6월28일 재차 West에게 장황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새로운 광산 기술자를 만나러 지난 5월 유럽으로 출장 갈 예정이었으나 동부로 간 형이 오늘,오늘…하면서 광산에 미처 돌아오지 않아 출장이 지연되었다.’고 말하고 ‘광산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빨리 석방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다시 칼튼에 의해 기각되었다. 칼튼은 장교단의 조사 결과를 검토한 후 포로들을 모두 유마요새로 보내면서 태평양 지역 사령관 Wright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모우리와 어떤 개인적인 악의가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반역과 스파이 행동을 정직하게 조사했을 뿐이다.”라고 썼다.

1862년 7월4일 모우리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병사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유마로 향했다. 모우리와 함께 포로가 된 Palatine Robinson은 남군이 투산 점령시 남군에 의해 몰수된 재산을 수령하고 또 옛날 저지른 살인과 멕시칸 소녀 불법매매 혐의로 유마로 행했다. Daniel H. Stikney는 남군의 아리조나 군정지사 Baylor 밑에서 법정 간수를 한 죄로 유마로 끌려갔다.


옛 근무지 유마요새로 압송된 모우리

태평양지구사령관 Wright 장군은 모우리의 사건을 세밀히 검토하고 이를 유마가 아닌 뉴 멕시코의 산타 페이의 민간 법정에서 다루도록 1862년 10월 22일 사건을 넘겼다. 결국 모우리 사건은 알부퀘크의 제3 지구재판소의 Kirby Benedict가 담당했다. Benedict 판사는 사건을 검토한 후 피고와 증인을 소환하는 것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범인들을 메실라 같은 남부 골수지역을 안전하게 호송하고 또한 이들 주요 범인을 수감해야 할 감옥도 문제였다. 또한 엄청난 재판 비용도 생각해야 했다. 또한 법원에서 예비조사를 하고 재판에 들어가자면 빨라야 1863년 5월이나 가능했다. 이러한 애로사항을 Wright 장군에게 전달하기 전 워싱턴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1862년 9월3일자로 사건을 다시 조사하자고 나섰다. 드디어 유마의 군 조사단은 모우리가 주장하는 헌법에 명기된 “개인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행복 추구권”을 인정하여 1862년 11월4일 석방을 명했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승마와 여흥,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 석방은 되었으나 모우리는 자신의 광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주인이 없는 광산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몇년 후 광산을 되찾은 모우리는 운영자금을 마련하러 런던을 찾았다가 1871년 10월14일 한 숙소에서 생일 하루 전 사망했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살다 간 짧은 생이었다.* 


new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