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힐라 강변에 황금열풍이…'힐라 시티'의 탄생

탐욕의 눈길이 스쳐간 황야는 이제 무한의 세월이 자리했던 순결을 잃었다.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 채 억겁의 세월을 고고히 지나온 황야, 그곳에 탐욕스런 인간들의 무자비한 발길은 태고의 신비를 철저히 파괴했다. 바람소리, 강물소리, 새 소리가 지나던 황야에는 지축을 울리는 마차 바퀴소리, 성난 광부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힘에 겨워 헐덕이는 노새의 울음소리로 대신했다. 들새가 목을 축이던 강, 이슬이 반짝이던 들꽃, 작은 들짐승이 몸을 가리던 덤불이 가득했던 황야는 사라지고 그곳에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거친 발길만이 가득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은광개발로 호황을 이루던 아리조나의 중남부지역은 아파치들의 발호로 더 이상 광산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황금열풍을 따라 나섰다가 실망한 모험가들이 대신 힐러 강과 코로라도 강 주변을 열심히 살피자 그곳에는 모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박이 터진 소문에 순간 주민 천여명의 도시가 탄생
1858년 드디어 아리조나에서 노다지가 터졌다. 텍사스가 미 영토가 되기전 텍사스 공화국의 육군 대령으로 멕시코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 Jacob Snively (1808~1871) 대령은 힐라 강변에서 동료 2명과 함께 대박을 터트렸다. 스나이블리 대령은 1849년 대원 12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금을 찾아나선 길에 힐라 강변의 힐라 밴드 근방에서 지상에 노출된 황금 조각을 주은 일이있다. 스나이블리 대령은 9년여전의 기억을 되살려 힐러 강이 코로라도 강으로 빠져드는 곳에서 동쪽으로 19마일, 힐러 산 남쪽에 있는 모니터 협곡에서 대박을 쳤다. 이 소식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자 3개월도 못되어 인근에는 1200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한 힐러 시티가 탄생했다. 그해 12월24일에는 우체국이 문을 열고 초대 국장에 Henry Burch가 임명되었다.
스나이블리 대령이 금광을 발견했을 당시 유마 요새에서 근무하며 이 지역을 순찰했던 모우리 중위는 “100여 명의 광부들이 가족과 함께 삽으로 열심히 땅을 뒤집었다. 이들은 보통 8삽 정도 흙을 담아 팬에 돌려 20 달러 정도의 황금 부스러기를 건졌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실제 사금채취에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도 20 달러는 보통이고 노련한 광부는 하루 135 달러도 벌었다.
광부 주머니 노린 온갖 장사꾼이 모여들어
광부들이 목돈을 만지자 힐러 시티에는 이들의 돈을 노리고 온갖 장사치들이 몰려들었다. 술장사가 위스키 통과 당구대를 들고 황무지에 나타났다. 이어 유대인들이 마차 가득 청바지나 고급 옷, 그리고 호화로운 물품을 싣고 와서 광부들의 돈을 채갔다. 그러자 어느 장사꾼은 돼지고기나 콩 요리가 든 통조림 등 각종 간이식품을 싣고 나타났다. 곧 술집 옆에는 식료품상이 들어서는가 하더니 그 옆에는 중국 음식점이 문을 열고 구수한 냄새로 광부들을 유혹하고 도박장도 문을 열었다. 얼마 안되어 힐러 시티에는 교회와 감옥만 빼고 모든 것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힐러 시티의 이러한 영화도1862년 홍수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자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사금의 채취량이 줄어든데다 인근에 새로운 광산이 터지고 라 파즈라는 광산이 생기자 탐욕스런 노다지꾼들은 미련없이 힐러를 버렸다. 1863년 7월4일 우체국이 간판을 내렸다. 그래도 목 좋은 곳에 자리잡은 광부들은 계속 금을 캐면서 힐러 시티를 지켰으나 1863년 말 경에는 근 800만 달러의 금을 토해내고 아리조나 최초의 유령도시가 되었다.
1864년 1월 이곳을 지나던 J . Ross Bowne 은 “한 때 인간들이 화려한 생활을 즐기다 버린 자취는 지나는 길손에게 서글픈 추억만을 남겨준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는 기다란 굴뚝 세 개 만이 우뚝하고 주위에는 승냥이 몇 마리만이 어슬렁거린다.”라고 여행기에 썼다. 아리조나는 본래 목재가 귀한 곳이다.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떠날 때 흙벽돌에서 목재만은 뜯어가지고 가기때문에 도시는 쉽게 폐허가 되어버렸다.
힐러 강변에서 아리조나 최초의 대박을 터뜨린 Jacob Snively 대령이 힐러 강변에서 어슬렁거리며 금을 찾아다닐때 캘리포니아에서 북군의 민병대를 조직하던 칼튼 장군은 유마 요새 사령관에게 “텍사스에서 온 스나이블리 대령을 철저히 감시하시오. 혹시 그자는 남군의 스파이인지도 모릅니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나이블리 대령은 요새의 병사들이 전선으로 이동하자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파치로 부터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인 1862년경 힐러 시티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던 스나이블리 대령이 10여일 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노새에 황금 60여 파운드(보석 측정단위인 트로이 기준)를 싣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적 드문 어느 협곡에서 포장마차 크기 만한 넓이를 단 3피트 만 파고 이렇게 많은 금을 캤다고 자랑했다.
힐러 금광 찾고 인디안에 살해된 스나이블리 대령
1866년 텍사스로 돌아간 스나이블리 대령은 탐험대를 조직하여 콜로라도 강 북부지역에서 탐광작업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스나이블리 대령은 유마 카운티 설립에 주도적 역활을 하고 카운티 내의 캐슬 돔 은광 개발에도 관여한다. 스나이블리 대령은 이후 아리조나 연방 영토 초대 지사 John N. Goodwin 에 의해 처음 실시되는 대의원 선거 때 지역 관리인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871년 3월27일 스나이블리 대령은 동료들과 위켄버어그 근방을 탐험하던중 화이트 피카초 인디안의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는다.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지 못하고 홀로 사망한 스나이블리의 시신은 산짐승에게 반은 뜯긴 채 방치되었다가 그가 운명한 마른 강바닥에 매장되었다. 8년 후 길레트 시로 이장했으나 이후 길레트 시 역시 유령도시가 되었다. 빌 윌리암스 산 동쪽에 물이 솟는 물구덩이를 “스나이블리 물구덩”이라고 부른다.
한편 사냥꾼 겸 안내인 Pauline Weaver에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인디안들이 찾아왔다. 인디안들은 Weaver에게 코로라도 강 동쪽으로 가면 백인들이 좋아하는 노란 돌, 즉 황금이 많다고 귀뜀해 주었다. 과연 인디안들의 말대로 Ehrenberg의 위쪽으로 Michael Goldwater의 교역소에서 10 마일 지점에서 1862년 금을 찾았다. 사양길의 힐러 시티에서 금을 캐던 광부들이 모여들자 삽시간에 라 파즈라고 불리우는 광산촌에는 5,000여 명의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1870년대까지 근 800만 달러어치의 금을 캐냈다. 1870년 이곳에 대홍수가 일어나자 라 파즈의 사금 나오는 강바닥 반을 쓸어갔다. 주민들이 미련없이 떠난 라 파즈는 옛날의 화려한 흔적만 남은 유령도시가 되었다.
Pauline Weaver(1797~1867.6.21)는 테네시 주 화이트 카운티에서 백인 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캐나다의 허드손 베이 회사에서 일한 Weaver는 대원 50여명을 이끌고 로키산맥을 탐험하는 등 일생을 산나이로 살은 전설적인 모험가이다. 유난히 토착민과 친화력이 좋은 Weaver는 1846년 Stephen Kearney와 함께 몰몬 대대를 솔트 레이크에서 아리조나 지역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군부대의 안내인으로도 20여년을 봉사했다.
1867년 그가 사망하자 Verde 요새는 일생 그가 군을 위해 헌신하고 인디안과 군 사이에 평화를 유지시켜온 점을 들어 최고의 예우로 장례를 치르고 요새 내에 매장했다. 요새가 폐쇄되자 그의 유해는 샌 프란시스코로 이장 되었다가 1929년 아리조나의 보이스카웃과 학교 어린이들이 모금하여 그의 유해를 프레스캇으로 이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