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라이프칼럼] 어머니 생각

어머니, 비록 하늘나라에 계셔도 자주 이렇게 편지좀 띄우고 싶건만 그것조차 잘 되지를 않습니다. 살아 생전에 한 자씩 또박또박 편지를 올리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세상 작별을 하고 30여년이 흘러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 편지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컴퓨터로 뚜닥뚜닥 몇 자 써서 이메일로 보내고 또 트위터라는 신기한 소셜 미디어가 있어서 글자 몇자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희생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따로 성함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성함이고 그 성함으로 평생을 사십니다. 이런 어머니들에게 어머니 날이라는 날 하루를 상술로 대신하는 현실이 너무 천박하다고 느껴집니다.
어머니 때문에 젊은 나이에 울보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다쳐도 왜 지금도 훌쩍훌쩍 어머니 생각에 쭐쭐 눈물을 보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나라 전체가 가난하고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던 시절에 부모님 곁을 떠나 남편 한 사람 바라보고 떠나올 때만 해도 별로 슬픈일을 당해 보지 않았으니 눈물을 보일 일이 없던 제가 어머니를 떠나 온 이후로 부쩍 울보가 되었던가 봅니다.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나 편지를 받을 때나 부모형제 생각, 친구 생각, 왜 그리도 많은 눈물이 나왔던지 오죽하면 김서방이 집에 말해서 편지 보내지 말라고 하겠다고 저에게 겁을 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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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리 장한 일을 하고 왔다고 저녁에 피곤하다고 들어오면 저를 눕혀 놓으시고는 다리를 주물러 주시던 어머니. 키가 작은 탓에 다리가 더 많이 피곤한가 보다고 다리를 늘려주시겠다고 다리를 쭉쭉 펴 주시고는 다리 올려 놓으라고 베게를 몇겹 올려 놓아 주시던 어머니. 겨우 하고 온 일이라고는 친구들 만나 다방에서 홀짝거리며 차 마시고, 음악감상실 다니고, 저녁먹고, 영화보고 그나마 영어 때문에 미국 문화원으로, 영어학원으로, 높은 하이힐 구두 신고 다녔으니 다리가 아플 수밖에요. 미국에 온 후, 모두가 제 손을 거쳐야만 하니 젊은 새색시가 무엇을 합니까? 어머니 생각에 눈물만 더 늘어 났습니다.
이제 철들고 돌아 보니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시다, 마음이 언짢다, 자식들에게 불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불평을 하셨다면 저에게도 효도를 할 기회가 있었을 것을 어머니는 항상 행복하신줄 만 알았습니다. 어느 인생이 항상 행복한 인생이 있습니까? 효자아들에 효녀 딸 두셨다고 저희들 보고 닮으라고 늘 자랑하시던 어머니. 효자효녀가 있으면 뭐 합니까 자식들 번거러울까 평소 모습대로 깔끔하게 일찍 떠나 가신 어머니. 너무 깔끔하신 성격의 어머니가 밉습니다. 남들처럼 대충대충 사시지 않고 왜 그리도 반듯하게 사셨는지요.
나중에 잘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철부지가 결혼을 하고 이제는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미국에 오기 위해 준비를 하고 다닐 때 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생활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눈물로 쓴 편지나 보내 드리고 용돈이나 몇 푼 부쳐드리는 것이 무슨 효도입니까. 시어머님 모시고 살면서 학교생활하고, 직장생활하고, 취미생활하고, 핑계가 많았지요. 저는 아무래도 효녀는 못 되는가 봅니다.
효도도 못하고 떠나 온 딸이 뭐 그리 보고 싶다고 제가 떠나 온 후 하늘을 향해 제 이름을 부르셨다는 어머니. 어머니 사랑의 100분의 1 만이라도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기회가 있었다면 이토록 마음이 아프지나 않을 것을 왜 그 때는 언니 오빠만 믿고 어쩌면 그리도 몰랐을까요. 어머니의 연세처럼 가득찬 제 나이를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텅 비고 속절없이 흘러 간 세월을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그 때, 지금의 제 마음과 같으셨으리라 생각 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어머니, 몇십년 전, 어머니가 하신 것 처럼 저도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 보렵니다.
어^^^^ㅁ^^^^마^^^^어^^^머^^^니^^^.
05. 06. 2013
아리조나 한국문화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