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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황야에 강물이 흘러흘러 옥토가 되고 (6)- 황무지 '태양의 계곡'에 밀, 보리가 자란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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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캄 인디안이 사라진지 몇 백년만에 버어디 강변 240에이커의 들판에는 푸른 옥수수와 밀, 보리가  강바람에 물결쳤다. 너른 들 한쪽에는 양파며 시금치, 당근같은 채소가 새벽 이슬을 듬뿍 안고 햇살에 영롱하게 빛났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땀흘려 일군 농장을 바라보며 언젠가 식탁에 오르게 될 야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요새 사령관으로 아파치 토벌대신 전 요새의 병사들을 수로작업에 동원했던 베넽 Clarence Edmund Bennett중령이 1866년 8월15일자로 옷을 벗고 월급 150달러에 요새 농장의 총감독이 되었다. 후임으로는 샌포드 George B. Sanford 대위가 부임했다. 당시 요새에서는 민간인 안내원, 급행문서 수발원이나 대장장에게는 월 75달러 그리고 가축 몰이꾼에게는 35달러를 지급했다. 베넽은 48명의 막노동군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다. 요새에서는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매월 2,350달러의 임금을  지불했다. 베넽은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캘리포니아의 산 버어나디노에서 농장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다.


월 150달러에 농장 감독이 된 요새 사령관

맥다우엘 장군과 베넽 중령의 야심찬 계획에 대해 주위의 시선은 싸늘했다. 주지사 맥코어믹 (Richard McCormick) 은 병사들을 아파치 소탕 대신 벌판의 수로 작업에 동원한 처사에 대해 “병사들에게는 아파치를 진압하는것이 우선 과제다.” 라고 장군과 사령관이 싸움 대신 땅을 파는 일을 비난했다. 한편 프레스커트에서 발행하는 ‘아리조나 마이너즈 (Arizona Miners)’ 신문은 요새의 병사들이 부식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황무지에 농장을 건설하는 것은 치하할 만하다 라고 말하고 “사령관은 이곳 요새에 왜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된다.”고 간접 비난했다.


1866년 가을 240에이커의 농장에서 첫 수확을 보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첫 수확은 초라했다. 옥수수나 밀은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그처럼 병사들이 고대하던 야채도 볼품이 없었다.

1867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한  사령부에서 온 검열관 러스링 준장은 농장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사령부에 올렸다. 

“농장을 돌아본 결과 금년 농사도 평년작 이하임을 확인했다. 파종한 밀들은 고르게 자라지 못하여 어느 곳은 실하고 어느 곳 밀은 아주 가늘고 여위였다. 나는 직접 농장 전체를 말을 타고 돌아보았다. 과연 많은 노동력과 자본을 투자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농장 운영에 따른 농사일지와 장부를 검열하고 실망했다. 나는 관계장교인 카아르 Carr 대위와 일부 장교들이 요새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것은 예산 낭비일뿐만 아니라 허망한 꿈이라고 생각한다는것을 안다. 나는 카아르 대위에게 문제점과 개선책을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카아르 대위는 달랑 종이 한장만 내게 보냈다. 그것도 자기 변명만 가득 늘어놓은채.”


농장에서  막일하는 요새 병사에 비난쇄도

어쨌든 수확한 옥수수는 제대로 영글지 않고 또한 변질되었다. 만약 업자가  납품했다면 당장 반품되었을 것이다. 말의 사료로 사용했다가 말이 탈이라도 난다면 그 책임은 당장 변질된 옥수수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 농장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실패했고 요새도 주위의 아파치를 진압하여 정착민을 유도하는데도 실패했다.


만약 요새 내에 농장이 없었다면 요새 주변에는 알맞은 가격에 곡물이나 야채등 부식을 공급하는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금 요새 주변에는 목장이 하나 자리잡았다. 요새에서 계속 농장을 운영한다면 요새 주변에 정착민의 곡물시장이나 야채 시장은 생겨날 수가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점을 감안하여 나는 요새의 병사들은 아파치와 싸우려고 존재하는 것이지 농사를 지으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려한다. 그리고 군대의 사기를 저해한 ‘베넽’ 농장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한다. 나는 이 순간부터 요새의 병사들이 농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하고 또한 요새는 사방 1마일씩 축소하고 농장은 임대하거나 매각하던가 아니면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 라고 검열관 러스링 장군은 단호한 조치를 내렸다. 이후부터  야심차게 시작한 맥다우엘 장군의 농장에서 병사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되었다. 한편 농장 총감독 베넽은 다시 소집되어 기병연대로 돌아갔다.


농장은 민간인에게 임대하고 병사는 싸움터로 

아파치들이 몰래 들어와 탈곡기의 벨트를 훔쳐가는 농장은 민간인에게 임대해 새주인을 맞았다. 경쟁 끝에 요새에서 소위 계급장을 달고 피마 인디안 부대를 지휘하던 행코크William A. Hancock가 농장의 새 주인이 되었다. 러스링 장군이 예측했던 대로 요새의 병사들이 아파치 인디안을 제압하자 솔트 강과 버어디 강 주변에는 요새에 곡물과 야채와 말먹이를 납품하는 시장이 들어섰다. 솔트 강변에는 잭 스윌링이 인디안 수로를 정비하여 농사를 지어 요새에 납품하고 주민이 몰려들어  피닉스 마을이 탄생했다.


맥다우엘 (Irvin McDowell) 장군은 1818년 10월15일 오하이오 주의 컬럼부스에서 태어났다. 웨스트 포인트 재학중 프랑스 군사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1838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맥다우엘은 캐나다와 뉴 잉글란드 국경지대에서 복무하고 이어 웨스트 포인트에서 책략학 관계 교관으로 복무했다. 이어 그는 미국-멕시코 전쟁시에는 부에나 비스타에서 용맹을 떨쳐 대위에서 소령으로 고속 승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43세의 맥다우엘은 준장으로 진급하여 버어지니아의 동북쪽 지역 사령관이 되어 벌 런 Bull Run 전투에서 웨스트 포인트 동기이며 2등 졸업생인 남군의 보어가아드 P.G.Beauregard장군에게 지원군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대패한다. 맥다우엘 장군은 23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1862년 장군은 수도 워싱톤의 지역 방위사령관으로 전보된다. 그는 강철같은 의지의 사나이였다. 일생 담배와 술 심지어 커피까지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언젠가 말이 넘어지면서 말에 깔렸다. 의식을 잃은 장군에게 군의관이 강제로 브랜디를 입에 부었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목에 힘을 주어 브랜디가 싣도로 흘러드는것을 막았다고 한다. 장군은 이어 1864년 6월1일 서부지역사령관으로 전보되고 1865년 아리조나 지역사령관 메이슨 장군의 요청에 따라 맥다우엘 요새를 세웠다.


1866년 캘리포니아를 떠나 동부지역사령관, 1872년 1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한 태평양지구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882년 10월15일 64세로 전역한 장군은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커미셔너로 잠시 근무하고 1885년 5월 4일 타계했다.


그를 기려 아리조나에는 맥다우엘 산 McDowell Mts과 동서를 가르는 맥다우엘 길 McDowell Rd이있다.


요새에 부식을 납품하려  정착민이 모여들어

주변에 맥다우엘 농장을 임대하여 운영한 행코크 William Augustus Hancock 대위(당시 하급 제대 장교는 거의 대위라고 호칭했다.)는 1831년 5월17일 메사추세츠의 바레 Barre에서 태어났다. 1853년 행코크는 형제들과 함께 아이오와에서 소떼를 몰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행코크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목장과 광산업을 경영하다 1864년 남북전쟁 때 캘리포니아 민병대 K중대에 배속되어 1865년 2월까지 유마 요새에 주둔한다. 이어 행코크는 아리조나 민병대로  전속되어 소위가 되어 맥다우엘 요새에서 피마 인디안 중대를 지휘하며 아파치와 전투를 벌인다.


1866년 제대한 그는 맥다우엘 요새 근방에 교역소를 차리고 운영하는 한편 농장을 임대하여 직접 경영한다. 측량기사 이기도 한 행코크는 1870년 피닉스로 이주하여 피닉스 타운 조합에 고용되어 시가지를 구획하여 오늘의 피닉스 시의 기틀을 다졌다. 메사 시도 그의 작품이다.

한편 그는 1871년부터 8년간 피닉스 시 우체국장도 역임하고 검사, 판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1902년 3월24일 신장염으로 타계. 그를 기념하여 그랜드 캐년 근방에 행코크 뷰트 Hancock Butte가 있다.


초대 맥다우엘 요새 사령관 베넽 (Clarence Edmund Bennett) 중령은 은 1833년 뉴욕에서 태어나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바라크 수비대와  다코타의 라라미 Laramie요새를 거쳐 캘리포니아의 산 버어나디노에서 근무하다 전역한다. 그는 그곳에서 농장을 경영하다 남북전쟁을 맞는다. 철저한 연방주의 자인 그는 그곳 민병대의 대위가 되어 이후 캘리포니아 민병대 제1연대 기병대의 소령으로, 드럼 바라크, 아리조나의 보위 Bowie 요새 에서 근무하다 임시 중령으로 맥다우엘 요새 사령관이 된다. 이후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요새 농장의 감독관을 역임한 후 다시 아리조나 민병대에 소집되어 정규군의 소위, 중위를 거쳐 다시 맥다우엘 요새의 병참장교로 복무한다.(미군들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할때는 민병대의 계급은 참고하지 않았다. 해당 장교들도 신규 계급에  이의를 제기하지않고 새 직무에 전념했다.) 1877년 11월 중령으로 진급한 베넽은 보병 11연대에서 근무중 1902년 11월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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