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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루즈벨트 댐 '태양의 계곡'에 번영을 가져오다(6)-댐 공사장 주변에 새 도시가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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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벨트 댐이 들어선 톤토 베이슨은 본래 살라도 인디안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호호캄 인디안들과 사촌관계인 살라도 인디안들은 리오 살라도 즉 솔트 강 유역을 떠나 솔트 강과 톤토 베이슨의 기름진 땅에 자리를 잡았다. 살라도 인디안들도 호호캄 인디안들처럼 황무지에 강물을 끌여들어 옥수수, 콩, 목화같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프리키 피어, 촐라같은 야생 식물과 토끼, 사슴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며 살았다. 그러나 호호캄 인디안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살라도 인디안들도 1450년경 톤토 베이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 인적이 끊겨 물소리 바람소리 뿐이던 톤토 베이슨에 뉴멕시코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흘러온 아파치들이 기름진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나운 아파치들도 스페인 제국을 거쳐 새 주인이 된 백인들에게 철저히 정복 당한 후 산카를로스 보호구역에 수용되고 톤토 베이슨 일대는 백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이제 태초의 정적이 사라진   톤토 베이슨에는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는 거대한 댐과 저수지가 들어서자 한때 이 땅의 주인이었던 용감한 아파치 전사들은 하루 노임 1달러 50센트의 노동자가 되어 무거운 바위덩어리를 날랐다.


60마일  도로공사 비용을 세 도시가 나누어 부담

230 피트 높이의 거대한 댐을 짓기위해 공사현장까지  자재와 인부들을 실어나를 도로를  건설하기위해 주지사 자문위원회가  2월19일 모임을 가졌다. 챈들러 (Alexander J. Chandler), 알커르 (Frank Alkire)와 윌버어 (Etherbert W. Wilbur)는 메사에서 톤토 베이슨에 이르는 60마일 도로신설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바위투성이인 산자락을 깎아 길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난공사였다. 그중에도  피쉬 크릭에서 공사현장으로 향한 2마일은 1마일당 공사비가 6천 달러가 소요될 정도로 난공사 구역이었다. 총 공사비는 대략 78,100달러로 추산되었다.

주지사 자문위원회는 용수자협회의 주식소유비율에 따라 도로공채를 발행하여 도로공사비를 조달하기로 했다. 피닉스는 4월11일 용수자협회 회원을 상대로 가부 의견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여 686대 38로 67,500달라의 도로공채를 발행하게 되었다. 또한 메사는 4월5일 투표에서 68대 2로 3,500달러를, 템피는 4월30일 투표에서 54대 10으로 각각 4,000달러의 도로공채를 발행하게 되었다.

도로공사에는 백인 노무자와 함께 산 카를로스 보호구역의 아파치 전사들이 활대신 망치와 삽을 들고 익숙한 솜씨로 바위를 쪼개며 길을 냈다. 이후 이 길은 아파치 전사들의 노고를 기려 루즈벨트 길이란 이름대신 아파치 트레일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905년 6월10일 처음으로 역마차가 이길을 따라 톤토 베이슨까지 달렸다. 그리고 새로난  이길을 따라 전신주가 세워졌다.


도로공사중 인사 사고도 발생

도로공사 중 인사 사고도 있었다. 5월1일 맥갈비라는 백인 노무자가 300피트 아래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함께 작업하던 동료들도 그가 절벽아래로 떨어진 것을 알지못했다. 또한 세엘이라는 노무자는 바위를 깨기위한 다이나마이트 폭파시간을 잘못 계산하고 미쳐 피하지 못했다가 오른 팔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메사에서 의사가 도착하기전 사망했다. 또한 산에서 바위가 굴러 노무자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매립청은 공사현장까지 전화선을 연결하기로하고 우선 메사에서 50마일 구간에 전화선을 연결했다. 메사에서 25마일까지는 철봉으로 된 전신주를 그리고 나머지 구간은 목재 전신주를 세우기로 했다. 선로 공사를 맡은 덴버 출신의 톨피 (James R. Thorpe)는 전신주를 구매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갔다. 1905년 2월12일 현장과 첫 통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힐라 밸리와 글로브 전화 회사는 글로브 지역상공인들이 모금한 800달러로 리빙스톤에서 글로브 까지  전화선을  연결했다.

2월들어 댐공사를 위한 간접시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각종 공사현장에는 400여명의 인부들이 투입되었다. 매립청 토목기사들의 사무실이 솔트 강 건너편 북쪽에 마련되는가 하면 강을 건너는 부유교도 설치되었다. 전화선 공사에는 30여명의 인부들이 투입되어 피쉬 크릭까지 전신주를 박고 시멘트 공장이 들어설 부지정리에 75명이 투입되었다. 또한 15명은 벌목에 동원되어 약 6,000 피트의 목재를 마련했고 30여명은 측량 보조로 나섰다. 이들중 백인 노무자는 하루 2달러에 숙식이 제공되고 아파치들에게는 하루 노임 1달러 50센트에 잠자리만 제공되었다. 또한 많은 노무자가 도로공사에 나섰다.


백인 노무자 일당은 아파치 보다 일당이 높아 

시멘트 공장 설비기계들은 글로브에 도착하여 공장설립 예정지까지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송업자는 덩치가 큰 기계설비가 운송중 혹시 파손을 우려하여 조심스레 운송일을 조정중이었다. 매립청은 또한 시멘트 제조에 필요한 유화제5만 배럴의 구매 입찰을 공고했다. 유화제는 입찰결과 최저가는 배럴당 3달러 48센트를 제시한 캘리포니아의 C.R. Eager 회사로 낙찰되었다. 또한 유화제가 도착하는 메사나 글로브의 철도역에서 현장까지 운송비는 1톤당 13달러 60센트를 제시한 템피의 기업인 샤크에게 돌아갔다. 유화제 운송에는 7개 화물운송업체가 경합했다. 그리고 유화제를 보관할 1천 배럴짜리 탱크를 메사에서 제작하고 2천 배럴짜리 탱크는 시멘트 공장 현지에서 제작하여 설치하기로 했다. 또한 시멘트 제조에 필요한 화목으로 미류나무는 100단에 4달러 50센트, 머스키트 나무는 500단에 5달러60센트에 공사현장에 고기를 납품하는 스터젼과 계약했다.

톤토 베이슨 근방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글로브의 리빙스톤 (Norman H. Livingston)이다. 그는 핀토 크릭 입구 상류쪽 11마일 지점에 리빙스톤 잡화상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어 그는 루즈벨트 타운에 들어가 식당, 곡물가게, 건초가게 등을 운영하여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글로브 지역 상공인들도 솔트 강유역 상공인들처럼 댐공사 근방에서 장사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매립청에 청원했다.

솔트 강 북쪽 톤토 베이슨 4분지 3마일 지점에는 매립청 기술요원들과 일부 가족이 거주할 숙소가 마련되었다. 또한 기반 공사가 활기를 띠자 근로자가 늘어나면서 공사장을 중심으로 20여채의 텐트가 늘어섰다. 매립청은 상인들에게 공사장 사방 3마일 내에서는 알코홀 음료를 절대 취급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영업을 허가했다.


공사장 주변 3마일내에서는 알코홀 판매 금지

상인들이 정부의 토지를 임대하는 조건으로 나무판자로 1층이나 2층짜리 가건물을 짓고 영업을 시작했다. 허허벌판에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텐트가 들어설때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이 없었다. 주민들은 무심코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토지측량기사 올버어그 (Charles R. Olberg)를 연상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올버어그라고 불렀다. 그러나 올버어그는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싫어했다. 자연 동네이름은 1904년 1월부터 루즈벨트라고 부르게 되고 그해 1월22일에는  우체국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상인들이 몰려들어 잡화가게 3개, 정육점, 마굿간, 이발소, 신발가게, 여관, 식당, 약국, 병원들이 자리잡았다. 또한 가게를 중심으로 5분 거리에는 우후죽순처럼 텐트촌이 들어섰다.

마을 길은 항상 먼지로 가득했다. 매립청은 스프링클러를 갖춘 마차로 마을 길에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혔다. 또한 바아네트라는 약종상은 자신의 약국에 아이스크림 소다를 25센트에 팔고 이미 루즈벨트 타운에 전기가 들어오자 식당주인 베이커는 식당 한편에 화려한 무도장을 마련하고 토요일이면 무도회를 열었다.

아파치 근로자들도 공사장 주변에 자신들의 방식으로 초막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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