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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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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루즈벨트 댐 '태양의 계곡'에 번영을 가져오다(7)-번영을 약속하는 초석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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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토 베이슨 크릭에 들어설 초대형 댐공사에는 미 전역에서 모두 22개의 건설회사들이 입찰에 참여했다. 매립청은 1905년 2월23일 총 공사비 1,147,600 달러에 공사기간 24개월을 제시한 텍사스주 갈베스톤에 적을 둔 오루크 (John M. O’ Rouke) 토목회사의 손을 들었다. 두번째로 최저가를 제시한 회사는 오루크 보다 39,600 달러를 더 높게 부른 대신 공사기간은 7개월이 짧은 17개월에 1,187,200 달러를 써낸 세인트 루이스의 로데릭 (Roderick and Wood) 회사였다. 그리고 공사금액  2,685,900 달러에 공사기간 30개월을 제시한 회사도 있었다.


댐 공사 입찰에 미 전역서 22개 회사 참여

톤토 베이슨의 댐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공사장 부근에는 매립청 직원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인명사고가 일어난 다음날인 1905 년 3월2일 솔트 강에서는 익사사고가 났다. 글로브에서 온 20살의 웨이즈멘 (Mills Van Wagemen)은 솔트 강을 가로질러 매달린 구름다리에서 동료 2명과 함께 매립청 직원 리친스 (Osborne Richins)가 기다란 계측기를 들고 강물의 유속을 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강 건너편 산비탈에서 커다란 바위가 굴러내리며 구름다리를 연결한 밧줄을 내리쳤다. 밧줄이 끊어지면서 공중에 매달린 구름다리는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다리 위에 있던 웨이즈멘과 함께 서있던 동료는 모두 물에 빠졌다. 유속을 재던 리친스는 계기에 의지하여 간신이 구름다리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강뚝으로 헤염쳐나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갈핀과 파머를 구했다. 그러나 생전 수영이라고는 해보지 못한 산간오지 글로브 출신의 웨이즈멘은 사고가 난지 16일 후 사고현장에서 8마일 거리의 유타 커널 상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구름다리가 끊어져 익사사고도 발생

매립청 본부에서 요원들의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중국인 아 수 (Ah Soo)는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익사직전 제방 북쪽에서 초막을 짓고 사는 아파치 노동자들의 가족이 건져주어 목숨을 구했다.

루즈벨트 타운에서는 결혼식도 열렸다. 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휴스톤은 옛 맥다우웰 요새에서 태어나 피닉스에서 자란 로즈 바레스코와 결혼했다. 또한 인근 목장에 들어가 목장주인의 부인과 어린 딸을 살해한 강도가 근처 산에서 교수형을 받는 일도 있었다.

아리조나 개척당시 전설적인 안내원 알 실버는 도로공사현장에서 바윗돌에 깔려 사망했다. 알 실버는 톤토 베이슨에서 아파치 노동자들의 도로작업을 감독했다. 이때 산위에서 아파치들이 옮기던 돌이 구르면서 알 실버를 내리치면서  두 다리를 망가뜨렸다. 서부의 전설적인 영웅은 결국 아파치들에 의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메사와 글로브의 기차역에서 시멘트 공장까지 운송을 기다리던 유화제가 공장에 도착하자 1905년 4월17일부터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가동 직후 공장은 증기발전기가 제대로 용량을 발전하지 못하고 석회석 분쇄기의 연결관에 문제가 생겨 계획된 생산량을 내지못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석회석 분쇄기의 제2 연결관을 교체하고 1906년 4월2일 임시 수력발전기가 전력을 생산하자 생산량은 당장 50%나 늘어났다.

시멘트는 애초 월 1만 배럴을 생산할 예정이었으나 어느 달은 1만 4천 배럴까지 초과 생산하여 보관창고가 넘치자 부득이 공장가동을 몇 차례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멘트 생산은 공사 진행에 맞추어 생산했으나 1906년 9월까지 3개월간, 그리고 1907년 5월과 9월 세차레나 가동울 중단했다. 댐이 완공될 때까지 톤토 베이슨의 시멘트 공장에서는 모두 338,452 배럴의 시멘트를 생산하여 외부에서는 단 1배럴의 시멘트를 구매하지않고 자체 생산한 시멘트로 웅장한 댐을 완공했다.


자체 생산한 시멘트로 댐공사를 완료

이는 시멘트 1배럴당 최저 입찰가격 4달러89센트와 시멘트 플랜트 건설비용을 감가상각한 생산원가를 3달러14센트로 환산하면 총 생산금액은 무려 1,063, 542달러36센트가 되어 솔트강 유역 주민들은 시멘트 자체생산으로 무려 591,487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시멘트 공장을 가동중 인명 사고도 있었다. 맥그로우는 1907년 12월25일 성탄절 임에도 근무중이었다. 나이 60의 맥그로우는 작업중 문이 열린 탱크를 들여다보다 몸의 중심을 잃고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가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젊은 시절 선원이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게 없다.

거대한 댐공사를 수주한 오루크는 동업자 스타인메츠 George N. Steinmetz 와 함께 댐을 건설할 현장을 둘러보고 1905년 4월21일 피닉스를 방문했다. 오루크는 매립청 관계자와 지역 상공인들과 환담을 갖고 당장 3백-5백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기반 조성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톤토베이슨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옮길 기중기가 세워지고 채석장에서 공사현장까지 돌을 나를 협궤도가 깔렸다. 또한 강 연안 남쪽 산기슭의 바위는 임시발전기를 세우기위해 폭파되어 모두 강물속으로 들어갔다. 또한 오루크는 인부 160명을 이끌고 손수 댐을 설치할 기단의 강바닥의 돌을 파내고 주위를 정비했다. 뉴욕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석공 50여명이 열차 편으로 메사에 도착한 후 샤투크와 데스몬드 승합마차 편으로 톤토 베이슨으로 향했다. 이미 현지에는 3백 내지 5백여명의 인부들이 북적대고 십장의 고함소리는 천년의 정적을 깨고 솔트 강 연안에 메아리쳤다.


공사 시작 소식에 부동산값이 배로 올라

댐공사가 활기를 뛰자 솔트 강 연안 상공인들도 바빠졌다. 지역 상공인들은 이제 아리조나는 방울뱀과 전갈이 우굴대는 황무지가 아니라 물과 햇살, 그리고 비옥한 땅이 있는 번영이 약속된 곳 이라고 선전했다. 이들은 1905년 1에이커당 75달러에서 100달러이던 오렌지 과수원이 이제는 150 달러, 그리고 40 달러에서 60 달러이던 농지는 100달러를 호가한다고 했다. 그리고 2년내 솔트 강 유역 토지는 모두 배로 뛰어 오를 것 이라고 장담했다.

 9월들어 제1 채석장에서 약 20톤이 넘는 바위 3개를 폭파했다. 이때 폭파된 돌이 날아와 근처에 세워둔 기중기 4개 가운데 한 개를 파손시켰다. 기중기 3개는 채석장에서 그리고 나머지 1대는 강 바닥에서 돌을 캐는데 사용할 예정이었다. 부서진 기중기는 현장에서 수리했다.

1906년 9월20일 오후 톤토 베이슨 공사 현장에서는 반복되던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기 위한 행사가 엄숙하게 벌어졌다. 연방 매립청이 댐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부터 무려 4년간 도로를 신설하고 시멘트를 자체생산하는 등 각종 준비작업을 마친뒤 드디어 댐이 들어설 자리에 초석을 깔기로 했다.


공사 준비작업 4년만에 초석을 놓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루즈벨트 타운의 주민들도 현장을 가득 메우고 오루크를 비롯하여 그의 동업자 스타인 메츠 그리고 매립청의 수석기사 힐과 동료기사들이 이 순간의 증인이 되었다. 오후 5시05분 늦 여름의 석양에  빨갛게 물든 솔트 강의 강물은 유유히 흘렀다. 이때 거대한 기중기가 약 6톤이나 되는 돌덩이를 들고 좌우로 흔들더니 강바닥에 32피트 깊이로 깊게 판 웅덩이에 사뿐이 내려놓았다. 이어 인부들이 달려들어 호스로 물을 뿌려가며 돌덩이를 정성스레 닦았다. 그리고 다음날 초석 주변에는 40큐빅의 작은 돌들을 가즈런히 쌓으면서 초석위 에는 댐과 저수지가 들어서고 황량했던 대서부는 전혀 모습이 다른 새 역사를 맞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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