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용 아리조나 역사이야기] 루즈벨트 댐 '태양의 계곡'에 번영을 가져오다(9)-부족한 현장 일꾼 찾아 전국 3만리를 돌다

철새처럼 일감을 찾아 떠도는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톤토 베이슨 댐 공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소떼를 모는 카우보이들이 일감을 찾아 목장으로 몰려들듯 노동자들은 바위를 깨는 망치소리를 듣고 공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들 공사장 인부를 “루즈벨트 댐의 카우보이”라고 즐겨 불렀다.
공사장 인부들의 하루하루는 거칠고 힘들었다. 이들은 산자락을 뚫어 터널을 만들거나 폭파된 암석을 잘게 부시거나 콘크리트를 혼합하고 새로 낸 길을 고르는 단순노동이 고작이었다. 대부분 작업이 무거운 중장비에 의존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강인한 근육으로 해머나 도끼, 삽 같은 연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인부들은 협곡을 둘러싼 비탈을 단단하게 보강하기 위해 강바닥을 뒤져 사암을 캐기보다는 폭약을 사용했다. 인부들은 억센 팔뚝에 비지같은 땀을 흘려가며 조각난 바위덩어리를 들어 하나하나 협곡의 벽을 보강했다. 터널공사때는 더욱 더 힘들었다. 인부들은 긴 터널안에 가득찬 증기와 더운 열기로 질식할 것같은 고통을 참아야했다. 터널 안에는 환풍기를 설치했다해도 더운 증기는 어쩔 수 없었다. 실제 공사중 인부 2명이 질식사 했다.
한손에 4파운드 다블잭을 들고 바위를 깨는 석공
동부의 노천 광산에서 바위를 쪼던 노련한 석수들은 다블잭으로 능숙하게 돌을 다루었다. 이들은 한 손에는 4파운드짜리 다블 잭을 들고 한손에는 드릴을 잡고 돌을 깼다. 그러나 실수로 드릴을 잡은 손을 쳐 일을 할수없게 되면 당장 짐을 싸들고 현장을 떠나야 했다.
현장의 모든 작업이 노동자들이나 마소의 근육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트 강 350피트 상공에 연결된 1,200 피트 길이의 삭도를 따라 자갈이나 시멘트, 모래가 댐을 세울 강바닥으로 실려왔다. 또한 거대한 기중기도 한 몫을 했다. 이 기중기는 10톤이나 되는 바위를 들어올려 공중에 매단채 몇번 흔들거리다가는 가뿐하게 제자리를 찾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멘트 공장과 모래 채취장과 공사현장까지 3분의 1마일 길이의 삭도를 타고 계속 시멘트와 모래, 자갈이 현장에 도착했다.
하루 내내 공사현장에는 십장의 거친 고함소리, 인부들의 가쁜 숨소리, 바위를 깨는 폭파소리가 천년의 고요에 익숙했던 톤토 분지에 메아리 쳤다. 그리고 인부들의 얼굴에 흐르는 땀은 작열하는 아리조나의 태양에 번들거렸다.
루즈벨트 댐 공사장의 작업 여건은 그리 완벽하지 못했다. 우선 작업장이 일반 사회와 너무 격리되어 있고 운송수단등 모든 것이 불완전 하다보니 루즈벨트 댐 공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매력적인 작업장이 되지못했다. 자연 매립청이나 오루크 건설회사는 부족한 노동력 확보에 고심했다. 매립청이나 오루크 건설회사는 다른 지역보다 약간 후한 노임으로 그나마 떠나려는 인부들을 잡을 수 있었다. 광부 채용은 대부분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연장만 들 수 있으면 모두 현장에서 채용
십장들은 누구든지 일을 하고자 찾아오면 과거의 행적이나 신체검사같은 절차는 아예 무시하고 우선 지원자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망치나 삽을 들 수 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채용했다. 매립청의 엔지니어 총감독 루이스 힐은 “십장들은 어떻게 이 형편없는 여건 속에서 쓸만한 인부를 구하여 작업해 나가는지 의문이다.”라고 혀를찼다.
일반 잡역부들의 노임은 공사가 한창일때 평균 2달러 50센트로 서부의 어느 지역이나 업종보다 높았다. 당시 쇠고기 1파운드 값은 10센트, 감자 5알은 10센트, 레비스 청바지가 75센트, 신사복 한벌이 5달러, 가축용 건초 1톤이 8달러였다.
당시 현장에서는 채석장 엔지니어 4명이 가장 높은 노임을 받았다. 이들의 일당은 12달러로 일반 잡역부의 근 6배에 달했다. 다음이 5명의 숙련된 채석장 십장이 하루 6달러, 그리고 기중기로 돌을 옮겨 댐을 쌓는 7명의 석공이 하루 5달러, 폭파기술자는 4달러내지 5달러, 대장장이는 4달러였다. 그러나 엔지니어들의 임금은 경험 유무에 따라 천차만별로 3달러에서 12달러 사이였으나 대부분 3달러 선이었다.
단순 노동자의 일당은 평균 2달러50센트
1908년 매립청이 고용한 목수 4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9월4일 노동절에 맞추어 작업을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현재의 임금과 하루 8시간 근무조건에 만족하는 다른 노동자들은 파업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열심히 일했다. 당연히 매립청은 작업을 거부하고 파업중인 목수 4명은 해고하고 서둘러 피닉스로 달려가 대체할 목수를 구했다.
목수들이 파업을 주동하고 해고된지 몇달 후 글로브에서 발행하는 지역 신문에는 루즈벨트 댐 공사현장의 많은 노동자들이 작업조건과 생활 여건에 불만을 품고 타지역으로 떠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미쳐 떠나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도 회사를 상대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여차하면 떠나겠다고 위협한다고 보도했다.
10여년전 1892년부터 1895년 캠프 다이어 (Camp Dyer) 공사때 건설현장 노임은 1달러 75센트에서 2달러 선으로 지금보다 낮았다. 십장도 현장의 단순 근로자보다 고작 25센트 내지 50센트가 높았고 목수나 대장장이, 엔지니어, 석수, 석공도 3달러 내지 5달러 선이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받는 숙련공의 일당도 4달러 78센트였다.
공사현장의 노임은 15년후 프레젼트 레이크 댐공사때는 시간당 30센트 내지 50센트가 올라 하루 일당은 2달러 40센트내지 4달러선이 되었다. 특히 목수같은 숙련공의 노임은 시간당 60센트 내지 75센트가 올라 일당은 4달러 80센트 내지 6달러 40센트가 되었다. 당시 아리조나 농장 근로자의 노임은 시간당 10센트였다.
루즈벨트 댐공사가 한창일 때 미국은 최고의 호경기를 누려 어디를 가나 일자리는 많았다. 매립청이나 오루크 건설회사는 반대로 인부들 확보에 고심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또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회사를 압박했다.
부족한 일손 구하러 전국을 헤매다
1906년 3월21일자 글로브의 한 지역신문에는 200명의 인부를 급히 구하는 오루크 회사의 광고가 나온지 얼마 지나지않아 “댐공사 현장에는 극심한 일손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고있다.”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공사장 십장들은 부족한 인부를 구하기 위해 현장을 버려둔채 텍사스의 갈베스톤에서 캘리포니아의 샌 프란시스코까지 달려간다 라고 보도했다.
얼마 후 공사장에는 뉴욕에서 온 이태리 출신 석공, 엘파소에서 온 멕시칸 잡역부가 그리고 갈베스톤 출신 흑인 노무자, 산 카를로스 인디안 보호구역의 아파치가 나타났다. 그러나 현장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생각보다 일이 힘들고 작업여건이 좋지 않다고 불평이 많고 서로 잘 어울리지를 못했다.
오루크가 모집해 온 이태리 출신 석공 200여명은 백인 십장 코치온 (John Cochion)과 항상 으르렁댔다. 어느날 이태리 석공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파업에 나서겠다고 코치온을 협박했다. 석공들과 원만한 타협을 보려고 갖은 애를 쓰던 코치온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철봉을 잡고 한 이태리 석공의 머리를 내리쳤다. 석공들은 돌을 던지며 저헝했으나 마침 주위에 있던 다른 노동자들의 만류로 싸움은 진정되었다. 다음날 이태리 출신 석공들은 코치온을 해고하지 않는 한 작업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회사를 협박했다. 드디어 코치온은 구속되고 벌금 6달러를 내고 석방되었으나 그는 보따리를 싸고 현장을 떠나야 했다.
홍수가 일면 모든 작업은 중단되었다. 작업이 중단되면 인부들은 하루 일당을 손해보고 생활비는 그대로 지불해야 했다. 한번 홍수가 일면 인부들은 미련없이 보따리를 싸고 현장을 떠나 다른 일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매립청이 고용한 목수 만 (William L. Mann)은 “내 일생 이처럼 작업하기좋고 훌륭한 감독관이 있는 일자리는 처음이다”라고 말하고 “이런 곳은 생전 다시 볼 수 없다”고 극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