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칼럼] 무념(無念)의 하루

비도 안 내리는 아리조나의 장마철 탓인가 마음이 우중충하고 삶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모두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삭막한 얘기들 뿐이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늘 바쁘다면서도 모여 앉으면 남의 얘기로 대화의 꽃을 피운다. 대화의 빈곤 탓이다.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두들 알지만 아까운 시간이 술술 빠져 나가는 것을 미쳐 느끼지 못한다. 좋은 친구들과 서로에게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남의 흉이나 보며 시간을 헛되게 보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이 아깝게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 시간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데…
볼 것과 보지 않을 것, 듣는 것도 분별해서 들어야 하고, 책도 가려서 읽고, 말도 가려서 해야 시간을 아끼는데 보탬이 된다고 믿는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모래를 한 웅큼 쥐었을 때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술술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주워 담는다 해도 다시 똑같이 빠져 나간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라는 책을 쓴 그륀 신부는 ‘그 흩어지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충고한다. 작가의 말 중에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해놓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가책을 느끼며 허겁지겁 쫓기는 삶보다는, 적당하게 결심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실제로 살아 온 날들을 돌이켜 보니 화살같이 빠른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덧없음이 깨달을 시간도 없이 맥없이 날라가 버렸다.
물도 보고, 산도 보고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오늘 하루만은 아무 생각없이 무념(無念)의 하루를 보내겠 다고 캐년 래이크(Canyon Lake)를 찾았다. 고속도로 60번 거의 동쪽 끝 아이다호(Idaho)에서 빠져 북쪽으로 올라 간다. 아패치 트레일(Apache Trail)이라는 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는데 여기부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담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다. 철마다 바뀌는 모습이 앙증 맞게도 예쁘다. 튀는 모습도 아니고 늘 잔잔하게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높이도 알맞게 전체의 분위기를 살려 주는 그 자연미에 항상 흠뻑 빠지곤 한다. 양쪽으로 얕으막한 벌판에 온갖 꽃종류와 이름모를 풀잎들, 선인장들이 군데군데 서 있어 높고 맑은 하늘과 경쟁하듯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캐년 래이크(Canyon Lake)에 가는 것 보다도 아패치 트레일의 거리가 마치 옛날 자동차가 없던 시절 서울 변방의 오솔길을 걷던 기억을 되 살려 준다.
더운 날씨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밖에 앉았는데도 그다지 덥지가 않았다. 물을 머금은 호수의 바람이 얼굴을 스쳐도 더운 바람이 아니다. 아래 물가를 내려다 보니 새끼 오리들 만 놀고 있었다. 어미도 없이 저희들끼리 다정하게 놀고 있는 모습이 갸륵하게 보인다. 손님들을 태우고 나갔던 유람선이 아주 천천히 들어 오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물위에 군데군데 떠 있는 큰 바위들은 마치 병풍을 드리운 모습처럼 둘려져 있다. 흰색의 모토보트들이 띄엄띄엄 물길을 헤치면서 달리는 모습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가까운 곳이고 잠간의 시간이었지만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건조했던 마음이 화-악 풀어진 느낌이다.
특히 가는 길인 아패치 트레일은 정녕 즐거움을 더 해 준 소중한 길이다. 아무렇지 않게 보면 그것도 그저 그렇다 하겠지만 갈 때마다 보여주는 모습은 항상 다르게 닥아 온다. 길가의 꽃들도, 선인장도 풀잎조차도.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을 만나기 쉽지 않다. 오랫만에 보는 아파치 트레일이 더 돋보이는 날이다. 돌아 오는 길에 멀리 강렬한 색갈을 띄우면서 석양이 지는 모습이 보인다. 자동차로 달리기는 해도 보리밭도 아니건만 오솔길이라고 스스로 이름지은 아패치 트레일 길에서 평소 좋아하는 가곡 ‘보리 밭’을 누가 듣는 사람도 없으니 창문을 열고 힘껒 불러 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중략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오랫만에 가져 본 무념(無念)의 하루, 머리도 마음도 다 비운 하루, 재충전의 하루가 되기에 충분했다.
07. 28. 2014
아리조나 한국문화원장
602-361-3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