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비버모피는 원주민을 파멸시켰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뉴펀드랜드 섬 연안에 잇다은 차가운 바다는 언제고 유럽 각국에서 몰려든 어선으로 가득했다. 검은 구름과 맞닿은 풍랑이 이는 지평선 바닷길 3천 마일을 달려온 프랑스, 네델란드 그리고 포르투칼과 영국 브리스톨 항구를 출발한 영국의 어선들은 몰려드는 대구며 청어 등 펄떡이는 물고기를 건지기에 바빴다. 원주민의 커누에 비해 유럽의 우람한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하는 어부들은 황금색 비버모피로 온 몸을 감고 모피장갑으로 손목을 가린 채 고기잡이에 열중하는 모습을 언제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들 원주민 어부들은 살을 에이는듯한 겨울바람을 아랑곳하지않고 언제나 고기잡이에만 열중했다. 얼마후 유럽의 어부들은 원주민들이 두른 비버모피가 추위를 막아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유럽의 어부들은 원주민들이 유럽산 철제 칼이나 도끼 그리고 냄비나 주전자 등 생활도구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럽의 어부들은 고기잡이보다 원주민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철제 생활도구와 비버모피를 교환하는데 더 열중했다. 점차 뉴펀드랜드를 찾는 유럽인들은 북미연안 해변에 출몰하여 원주민들과 서로가 필요로하는 물품을 교환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상류사회에는 어느새 비버모피가 최고의 인기품목이 되었다.
부드러운 황금 비버모피에 열광하는 유럽인들
유럽인들에게 비버모피의 진가를 알린 뉴펀드랜드는 영국에 의해 유럽사회에 알려졌다. 1497년 영국의 헨리7세는 이탈리아의 항해사 존 캐봇 (John Cabot: c 1455년 나폴리 근방에서 출생, 사망일은 불명)을 후원하여 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도록 했다. 존 캐봇은 항해중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뉴펀드랜드에 기항했다. 서기 10세기경 바이킹들이 잠시 머물다 떠난 뉴펀드랜드에 최초로 유럽의 문명인이 발을 디디면서 뉴펀드랜드 일대 바다에는 무진장 물고기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영국의 헨리 7세 후원으로 존 캐봇이 뉴펀드랜드에 최초로 기항하면서 이후 영국은 뉴펀드랜드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뉴펀드랜드 인근 바다에는 프랑스를 비롯하여 네델란드, 영국, 스페인, 포르투칼의 깃발을 매단 어선들이 모여들면서 자연 원주민들이 추위를 피해 두른 비버모피는 유럽 상류층의 전유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값이 엄청나게 비싼 비버모피는 부드러운 황금취급을 받았다.
유럽의 어부들이 몰려드는 뉴펀드랜드는 총면적 156,453제곱 Km. 대륙성 냉대습윤 기후에 속하며 이웃 래브라도 지역은 극지 툰드라에 속한다. 뉴펀드랜드의 서쪽은 북미주를 가로지르는 애팔라치아 산맥이 지나고 세인트 로렌스만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한 래브라도 섬의 동부는 퀴벡 주와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북부지역의 끝은 누나부트준 주와 경계를 이룬다.
비버의 땅 북미주 연안에 야욕을 펼치는 프랑스
이처럼 부드러운 황금 비버 모피가 지천인 뉴펀드랜드와 북미대륙에 처음 탐욕스러운 야욕을 드러낸 나라는 프랑스.
이탈리아 프로렌스 태생 다 벨라자노 (Giovanni da Verrazzano) 형제는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의 후원으로 1524년 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오늘의 인도가 아닌 북미의 대서양 연안 플로리다와 뉴 브룬스위크 (New Brunswick), 그리고 뉴욕 (New York)만과 나라간세트 (Narragansett)만을 발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쟈크 까르띠에 (Jacques Cartier)는 1534년 뉴펀드랜드 섬이 잇다은 캐나다의 세인트 로렌스 (Saint Lawrence)강 일대를 탐험하고 프랑스 왕 프랜시스 1세의 영토임을 선포했다. 이후 쟈크 까르띠에가 선포한 뉴프랑스는 로키산맥과 허드슨 강에서 멕시코 만까지 아우르는 캐나다, 아카다, 허드슨 만, 뉴펀드랜드의 5개 행정구역을 갖춘 뉴프랑스를 세웠다. 그리고 북미대륙 최강의 지배자가 되어 비버모피를 비롯한 신천지 물품교역권을 거머쥐었다. 특히 1608년 프랑스의 퇴역군인이며 항해사인 샤무엘 샹프렝 (Samuel de Champlain: 1567.8.13-1635.12.25)은 세인트 로렌스 강유역에 정착촌을 세우면서 인근 연안의 원주민을 앞세워 상품교역권을 독점했다. 샹프렝은 특히 캐나다 동부지역의 풍부한 목재와 대량 건조방식을 이용한 염장대구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제국에 무한정 실어날랐다. 피레네 산맥 을 중심으로 사는 바스크 (Basque)족들은 특히 고기잡이에 능했다. 그리고 염장 대구 건조방법을 창안한 후 건조된 염장대구와 목재를 유럽으로 운송했다. 이를 해상으로 운송하면서 선원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바람을 지나야했다. 이때 선원들에게 필수품으로 등장한 것이 비버모피였다. 비버모피 도움으로 선원들은 추운 북대서양의 겨울 바닷바람을 견딜 수 있었다. 자연 이같은 비버모피의 효능은 유럽사회에 전해지고 모피의 아름다움으로 가격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내륙을 찾는 사냥꾼, 연안을 찾는 원주민
뉴프랑스를 중심으로 프랑스인들은 일대의 물품교역권을 독차지했다. 점차 원주민과 상품교역량이 늘어나면서 뉴 프랑스의 정착민들은 더 많은 물품확보를 위해 내륙으로 발길을 돌리고 원주민들은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위해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내륙으로 진출한 뉴프랑스 정착민들은 더 많은 모피수급을 위해 인근 휴론 (Huron), 웬다트 (Wendat), 알곤퀸 (Algonquin), 인(Inn)부족과 친선을 유지했다. 특히 뉴프랑스 당국은 젊은이들과 원주민간의 접촉을 늘이기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뉴프랑스 당국은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오타와 (Ottawa)의 조오지안 베이까지 무역로를 확대했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사회에 비버모피 열풍이 일자 비버모피 무역권을 쥔 샹플렝은 프랑스 당국의 후원으로 비버모피의 과열경쟁을 막기위해 긴급조치에 들어갔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