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바다 안개너머 샌프란시스코 만이 보인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된 알타캘리포니아
알라스카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모피사냥감이 고갈되자 모피무역으로 유럽시장을 장악했던 러시아 제국까지 알타캘리포니아를 넘보았다. 러시아 제국은 알라스카에 본부를 두고 18세기 초 캘리포니아의 소노마와 멘도시노 카운티의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흐르는 곳에 정착촌과 요새를 마련했다. 러시아 측이 러시안 리버라고 부르는 이 강은 무려 115마일에 달하는 장 강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정착촌 주변에 포도농원을 조성하고 원주민을 상대로 모피무역을 했다.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주변을 근거지로하여 루이지아를 프랑스 영토로 삼고 텍사스를 두고 스페인측과 힘을 겨뤘다. 스페인측은 또한 플로리다를 두고 영국측과 알력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알타캘리포니아를 선점하기 위해 유럽열강들이 몰려오자 스페인측도 이의 선점에 열을 올렸다.
본래 유럽인들은 알타캘리포니아가 엄청나게 너르고 큰 섬으로 알고있었다. 누구도 감히 육상을 통해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하지 않았다.
구미 열강들이 알타캘리포니아에 발톱을 내밀 때 유럽인들에게 알타 캘리포니아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면이 바다에 둘러쌓인 거대한 섬이었다. 당시 누구도 알타캘리포니아가 섬이 아닌 남미 대륙에 연이은 대륙이라고 반론하는 자는 없었다. 이같은 이론에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키노 신부가 알타캘리포니아는 섬이아닌 남미 대륙과 연결된 대륙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를 유럽대륙에 발표했다.
키노 신부 ‘바하캘리포니아’에 포도 소개
프란시스코 키노 (Francisco Kino, SJ : 1645.8.10-1711.3.15)신부는 이탈리아 알프스 산 근방 세뇨흐 (Segno: 발음 기호 seyno-yoh)에서 태어났다. 20세때 예수회에 입문한 청년 키노는 랜스버어그 대학 재학 중 심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맸다. 키노는 주님의 은총으로 완치된다면 일생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사목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이방인 전교에 헌신하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다시 생명을 얻은 키노 신부는 아시아 대륙으로 선교할 기회를 엿보면서 대학에서 교수와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토록 해외선교를 원하던 키노 신부는 1681년 1월27일 출항 3개월만인 1681년 5월3일 뉴스페인 베라 쿠르즈에 도착했다. 키노 신부는 이시드로 안토니오 (Isidro Antonio)가 이끄는 바하캘리포니아의 정착촌과 선교원 건립에 고니 (Matias Goni) 신부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바하캘리포니아의 라파즈 (La Paz)에 이은 산부르노 부근 로레토 (Loreto)의 정착촌과 선교원 건립은 양식을 비롯한 보급품 문제로 실패하고 1685년 4월6일 정착대는 전원 철수했다. 키노 신부는 바하캘리포니아에 처음으로 포도나무를 선보였다. 또한 이곳에서 사목하는 도중 아름답고 푸른 조개를 바하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보았다. 아름답고 푸른 조개를 근거로 이후 키노 신부는 알타캘리포니아가 섬이 아닌 대륙이라는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피멜리아 사막에 선교의 둥지를 틀다
키노 신부는 1685년 11월 20일 새로운 선교지로 피멜리아 알타지역의 사릭 (Saric)과 구에이마스 (Guaymas)지역 선교책임자가 되었다. 피메리아 알타는 소노라의 피마 원주민의 땅으로서 남부 아리조나와 멕시코 북부지역의 소노라 (Sonora) 사막지대였다. 키노 신부가 임명된 사릭(Saric)은 사막이 대부분인 황무지로서 멕시코에서 가장 더운 험지 중 험지였다. 또한 구에이마스 (Guaymas)는 소노라 사막지대의 남서부에 위치하여 소노라의 주도 헤르모시요에서 남쪽으로 134킬로, 미국 국경과는 380킬로의 험지였다. 키노 신부가 선교할 소노라의 원주민은 주로 마요 (Mayo)부족, 야쿠이 (Yaqui )부족, 오담 (O’odham) 부족, 세리 (Seri)부족 등 거친 사막에 거주하는 부족이었다. 키노 신부는 원주민 부락에 나무가지와 덤불로 하늘을 가린 초옥에 거주하며 원주민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생활했다.
키노 신부는 거친 황무지에 둥지를 틀고 1687년 3월11일 돌로레스 (Doores)에 선교원을 세우고 주변 원주민을 대상으로 전교를 펼치면서 1711년 3월 선종할 때까지 원주민 마을 24개소에 선교원을 세웠다. 특히 키노 신부는 1690년 12월24일 살바테리아 신부와 장차 알타캘리포니아 전교에 힘쓸 것을 다짐했다. 키노 신부는 또한 1691년 1월 아리조나에 처음 발을 디디고 투마카코리를 방문한 후 1692년 8월에는 산 하비에르 델 박 (San Xavier del Bac)을 방문했다. 2년 후인 1692년 12월 11일 키노 신부는 캠포스 신부와 릴 (Leal), 그리고 호위병사 카라스코 대위의 호위를 받으며 세로 엘 나자레노 (Cerro el Nazareno)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 야산에 올라 희미하게 보이는 캘리포니아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행은 카보르카 (Caborca)에 선교원’Nuesta Senor de la Purisima’를 세웠다.
유럽인 최초로 힐라 강변을 돌아보다
키노 신부의 알타 피메리아 탐험은 계속되었다. 피메리아 지역은 아직 유럽인의 발길이 닫지않은 곳이다. 다행스럽게 원주민의 저항은 없었다. 1694년 11월 키노 신부는 처음으로 아무도 찾지않은 힐라 (Gila)강 상류를 돌아보고 원주민의 거대한 공동 주택이었던 거대한 까사 그랜데 (Casa Grande) 유적을 둘러보았다. 1695년 4월2일 피메리아 일대에 원주민 폭동이 일어나 사에타 (Saeta) 신부가 순교했다.
키노 신부는 힐라 (Gila)강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카라스코 대위의 호위를 받으며 힐라강 유역을 탐험한 키노 신부는 세로 델 피니카테 (Cerro del Pinicate) 산 정상에 올라 굽이쳐 흐르는 힐라강을 조망했다.
1699년 2월7일 키노 신부는 카보르카를 기점으로 멕시코에서 가장 뜨겁고 험하다는 ‘악마의 길 (Satan’s Route 또는 Camino del Diablo)’ 종단에 나섰다. 악마의 길로 알려진 이길은 멕시코 북서쪽 소노라의 카보르카에서 시작하여 알타캘리포니의 유마 땅에 이르는 장장 250 마일에 달하는 악마들의 땅처럼 험한 길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사막을 지나는 동안 식수는 높은 암반 투성이 바위 틈에 몇개가 눈에 뜨일뿐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주변에는 갈증과 탈진으로 숨진 길손의 무덤 50여기가 눈에 뜨일뿐 길 주변에는 선인장, 모래둔덕, 야생풀들만 더운 바람에 몸을 떠는 길이다.
보급선 찾아 유럽인 최초 ‘악마의 길’ 지나간 디아즈
유럽인으로 처음 악마의 길을 지나간 사람은 1540년 황금도시를 찾아나섰던 탐험가 코로나도 (Francisco Vasquez de Coronado)의 부관 멜치오르 디아즈 (Melchior Diaz: 1505-1541)와 그의 25명 부하들. 이들은 탐험대의 보급품을 실은 배를 찾아 콜로라도 강 유역을 수색했다. 그는 병사 25명을 지휘하여 탐험대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보급선의 행방을 찾던 중 말을 타고 악마의 길을 통해 콜로라도 강에 도착했다. 그는 강변에 사는 원주민들이 추위를 피하려 피운 난방용 연기가 콜로라도 강변에 자욱하자 이들을 연기속에 사는 사람들 즉 연기 “fume”이라고 불렀다. 이후 이말은 변형되어 ‘Yuma( 유마)’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멜치오르 디아즈 일행은 뗏목을 만들어 콜로라도 강을 건너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땅에 이르고 또 캘리포니아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말이라는 동물을 선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