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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바다 안개너머 샌프란시스코 만이 보인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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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에이고 원주민, 이주민과 충돌
포톨라가 몬트레이 북방에서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안전한 만을 찾아 원주민 마을을 헤집고 다닐 때 그간 세라 신부가 머문 산디에이고 요새와 선교원 주변 원주민 사이에는 이상기류가 생겼다. 그간 이주민에게 우호적이던 원주민들의 눈빛이 점차 사납게 변했다. 이제 원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도전적인 몸짓을 보이더니 노골적으로 이주민을 괴롭혔다. 그리고 요새안을 마음대로 배회하며 이주민들의 휴대품에 손을 댔다. 이들은 이주민들의 옷을 즐겨 손에 넣었다. 원주민들은 이주민들이 병이 들어 많은 대원들이 죽어나가자 요새내의 방어력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대놓고 도발했다. 
얼마후 양측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원주민들은 요새 주위를 둘러싸고 북을 치고 괴성을 지르며 공격했다. 원주민을 향해 절대 숫적으로 열세인 정착민은 장총을 들고 원주민과 맞섰다. 양측간의 충돌로 원주민 전사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총상을 입자 신식 화기에 놀란 원주민은 더 이상 공격하지않고 후퇴했다. 그리고 이주민 중에서 비즈카이노 신부를 포함하여 다수의 이주민이 부상당했다. 원주민들의 공격에 놀란 요새측 병사들은 요새와 선교원 주변에 방어용 말뚝을 박았다. 선교원 측은 호전적인 원주민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으나 대신 이들과의 접촉이 차단되어 더 이상 전교하는데는 실패했다.
양식을 조달하러 바하캘리포니아로 떠난 두척의 보급선은 좀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자라는 양식은 1770년 3월이 되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그간 소통이 뜸했던 원주민들과 물품을 교환하여 겨우 부족한 양식을 조달했다. 이주민들은 의복을 주고 원주민들로부터 대신 야생 거위나 물고기를 교환하여 목숨을 유지했다. 긴 여행으로 허약해진 이주민들은 양식까지 바닥나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다. 그간 몇차례 바하캘리포니아에서 양식을 실은 배가 도착했으나 바하캘리포니아 자체가 양식이 부족한 상태라 별다른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포톨라와 세라 신부는 산디에이고에서 철수하라는 상부의 처분만 기다렸다. 정확히 요새내의 버틸 수 있는 양식은 9일치. 3월 19일까지 보급선이 도착하지 않으면 부득이 요새를 포기해야했다.

바닥난 양식에 요새 포기 직전 보급선 도착
3월 19일은 마침 탐험대 수호성인 산 호세(San Jose)의 축일이었다. 세라 신부는 대원들에게 버틸 수 있는 9일까지 9일 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기다리는 날짜는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도 보급선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3월19일이 밝았다. 허기진 대원들은 만약에 대비하여 짐을 꾸렸다. 어느덧 정오가 지났다. 그리고 오후 3시경 바다만 바라보던 어느 병사가 “배가 보인다”하고 미친듯 고함을 쳤다. 해안가에 옹기종기 모여 바다끝 수평선만 바라보던 이주민들은 병사가 가르키는 수평선 너머 작은 점같은 배를 발견한 후 땅을 구르며 환성을 올렸다. 그러나 작은 점은  점차 보급선으로 다가왔다. 모습을 드러낸 보급선 산안토니오 호는 산디에이고 만을 스쳐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실망으로 주저앉은 대원들은 땅을 치며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4일후 산안토니오 호는 산디에이고 만으로 들어와 옥수수, 밀가루, 쌀을 풀었다. 산안토니오의 페레즈 선장은 마침 포톨라 대장이 몬트레이에서 기다린다고 지레 짐작하고 몬트레이로 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페레즈 선장은 산타바아바라 (Santa Barbara)해협에서 정박할 곳을 찾지못했다. 마침 선원 몇명이 근처 섬의 해변에 올라 친절한 원주민으로부터 포톨라 대장이 이끄는 탐험대는 오래전 산디에이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페레즈 선장은 4일 후 23일 오후 산디에이고에 단비같은 양식을 아사 직전의 대원들에게 풀었다.

몬트레이 2차 탐험대 요새를 신축하다
포톨라 대장의 탐험대는 혹시나 보급선이 몬트레이 만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년말이 다가오는 11월 10일이 되어도 몬트레이를 찾은 보급선은 없었다. 포톨라 대장은 간부회의를 열고 몬트레이에서 무작정 보급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서둘러 산디에이고를 찾기로했다. 일행은 11월 28일 몬트레이 만에 이웃한  카멜 (Carme)만을 지났다. 그리고 일주일 후 리베라 (Rivera) 대장이 지휘하는 제1진에서 낙오된 로레토 선교원 측 원주민 5명을 기다리는 동안 앞으로 돌아갈 일정을 협의했다. 포톨라 대장은 아직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천혜의 요새라는 만을 발견하지 못했다. 돌아가기 앞서 12월 7일 포톨라 대장과 크레스피 신부는 바다가 보이는 소나무가 우거진 숲 남쪽 산등성이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웠다. 십자가는 연안을 지나는 배에서 볼 수 있을만큼 큼지막했다. 크레스피 신부는 그간의 탐험 과정을 기록한 편지 말미에 “이 십자가는 소나무 숲 남쪽에 연결된 작은 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웠다.”라고 기록한 편지를 십자가 기둥 밑에 깊숙히 묻었다.
양식이 바닥난 대원들은 갈매기와 페리카같은 바닷새를 잡아 구워먹으며 길을 나섰다. 11월 30일 12명 가량의 루마센 (* Rumasen: 오늘의 살리나스와 카멜 강 주변에 살던 원주민들) 원주민이 일행을 찾았다. 원주민들은 허기진 대원들에게 씹어먹을 수 있는 이름모를 씨앗을 주고 사라졌다. 갈길은 아득한데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간 부식을 지고 탐험대와 동고동락한 노새뿐. 어쩔수 없이 탐험대는 노새를 잡아 고기를 구워먹으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허기진 대원중 일부는 노새고기 먹기를 거부했다. 점점 날씨는 차가웠다. 얼마후 온 천지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썼다. 산이며 들이며 온통 백색이었다. 바다가 가차워서인지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대원들은 찬바람을 헤치며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몬트레이를 출발한 지 한달 반만인 1770년 1월 24일 비릿한 노새고기 냄새를 풍기며 산디에이고 요새에 도착했다. 이번 6개월간의 탐험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가 없이 전원 산디에이고에 귀환했다. 제1차 탐험대에서 낙오되었던 로레토 선교원에서 탐험대에 자원했던 5명의 원주민은 6개월만에 산디에이고 요새를 찾아왔다.

몬트레이 만에 요새를 세우다
몬트레이와 산디에이고에 요새를 세우고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스페인 촬스 3세와 뉴 스페인 총독의  집념은 강했다. 몬트레이 만과 산디에이고 만에 요새와 정착촌을 세워 알타 캘리포니아를 선점한 후 로키산맥 너머 북미대륙의 중부와 서부를  차지한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산디에이고 만을 다시 찾은 포톨라 총독은 기력을 회복한 지 3개월만에 건강한 대원으로 탐험대를 새로 꾸렸다.  포톨라 총독은 페드로 페이지 (Pedro Fages) 중위를 포함한 12명의 카타란 (*Catalan 지원자 1,200명은 1768년 구에이마스와 피마의 세릭 원주민 반란 진압차 스페인에서 뉴스페인에 도착했다.) 지원자, 7명의 병사, 2명의 노새몰이꾼, 바하캘리포니아 출신 원주민 기독교인, 포톨라 총독의 시종으로 새로운 탐험대를 꾸렸다. 크레스피 신부는 몬트레이의 요새와 선교원 신축에  참가했다. 탐험대 제1진을 지휘했던 리베라 중위는 보급품을 조달하려 바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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