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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구미열강의 알타캘리포니아 쟁탈전 시작되다-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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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인의 최변방 소노라의 11월 아침은 코끝을 스치는 찬 바람에 싸늘했다. 디 안자 투박수비대 사령관은 1759년 12월 대위로 진급한 후 투박 수비대장에 취임한 지 15년 만인 1774년 10월 2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중령 디 안자 투박수비대 사령관은 11월, 투박수비대를 출발하여 밤낮을 쉬지않고 말을 달렸다. 디 안자는 캘리포니아 만을 따라 이어지는 해발 1만8백63피트의 험준한 산맥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 (Sierra Madre Occidental) 산자락을 끼고 근 1,400마일 거리의 뉴스페인 수도 멕시코시티를 향해 달렸다. 디 안자와 그를 수행하는 몇 명의 병사는 황제의 길, 엘카미노를 따라 주둔한 병영에서 지친 말을 갈아타고 밤낮으로 말을 달렸다. 디 안자와 병사들은 멕시코시티에서 330마일 거리의 과다라하라 (Guadalajara)와 이웃마을 자모라 (zamra), 모레라 (Morella) 지나 1774년 11월 13일 이른 아침, 총독관저가 있는 멕시코시티의 너른 광장 조칼로 (Zocalo)에서 말을 내렸다. 조칼로는 뉴스페인 제국의 주요행사가 열리는 너른 광장. 흘러내리는 땀을 수습한 디 안자 투박사령관은 거의 한 블럭을 차지한 웅장한 2층 총독관저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싸늘한 멕시코시티의 차가운 냉기가 전신을 감쌌다. 당시 멕시코시티는 5만여 명의 스페인계 유럽인과 3만5천여 명의 혼혈이 어울려 사는 미주대륙 최대의 도시였다. 도착 4일 후인 11월17일 부카렐이 총독 관저를 방문한 디 안자 사령관은 알타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수비대와 정착촌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11월24일 부카렐이 총독은 디 안자 사령관의 청원을 받아들이면서 태초이래 외지인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알타캘리포니아는 이제 전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 되었다.

1774년 11월 24일 탐험과 이주민 정착을 허가
멕시코시티 도착 4일 후인 11월 17일 투박수비대장 디 안자 사령관은 뉴스페인 총독 안토니오 부카렐이 (Antonio Maria de Bucareli y Urusua: 1713,1.24- 1779,4.9) 총독을 예방했다. 스페인 제국의 육군 중장으로 스페인 제국의 해외 식민지 감사관과 큐바 총독을 역임하고 1771년부터 뉴스페인 총독직에 오른 부카렐이 총독은 스페인이 세계 도처에서 경영하는 식민지 통치에 유난히 집착했다. 부카렐이 총독은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 이탈리아와 포르투칼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부카렐이는 현역 중장으로 해외 식민지 감사관에 임명된 후 소노라에 머물 당시, 알타캘리포니아 정착지 개발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사망한 디 안자 1세 프론테라스 사령관도 알타캘리포니아 탐험대의 보급로를 마련하려다 매복한 아파치들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디 안자 1세가 사망할 당시 디 안자 2세는 고작 만 5살도 미치지 못했다. 부친사후 35년만인 1774년 11월 디 안자 1세의 아들 디 안자 2세는 아버지 디 안자 1세의 유지를 이어받아 알타캘리포니아에 문을 연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이르는 육로를 개척했다. 이교도들의 땅을 지나 장장 500여 마일의 멀고도 먼 길을 육상으로 탐험한다는 것은 원주민들의 저항이 극심한 당시에는 감히 이룰 수 없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투박수비대 사령관 디 안자 2세는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총독의 염원을 실현한 알타캘리포니아 탐험과정을 기록한 탐험일지를 부카렐이 총독에게 바쳤다. 이미 탐험 전과정을 보고받은 부카렐이 총독은 그의 용기와 노고를 극찬했다. 그리고 1774년 10월 2일자로 대위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디 안자를 축하했다. 이 자리에서 디 안자 사령관은 몬트레이 수비대에서 북쪽으로 11마일 밖 산프란시스코 만에 이주민을 정착시키기 위한 대규모 탐험대를 파견하겠다고 탐험을 청원했다.
뉴스페인 수도 멕시코시티에는 총독이 상주하며 이곳에서 5천여 마일 떨어진 유럽대륙의 스페인제국 황제는 황실 평의회를 통해 뉴스페인을 통치했다. 대서양에 인접한 영국의 보스턴보다 1백여년 앞서 개발된 멕시코시티는 중미대륙과 북미대륙을 통해 인구가 가장 많고 번화한 도시였다. 당시 필라델피아가 인구는 3만, 뉴욕은 보스턴과 같은 인구 2만명의 도시였다. 너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흰색의 웅장하고 육중한 2층 총독관저는 너른 뉴스페인을 통치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육중했다. 높다란 총독관저에 아침 햇살이 어른거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알타캘리포니아 선점을 노리는 구미열강 
디 안자가 샌프란시스코 만에 이주민 정착촌을 서두를 무렵, 구미열강은 다투어 북미대륙을 선점하기위해 공공연하게 세력 확충에 열을 냈다. 스페인 제국은 1542년 항해사 로드리게스 까브리요가 해도 작성차 태평양 연안을 탐험하던 중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산디에이고에 발을 딛고 일대를 스페인 황제의 땅으로 선포했다. 이어 스페인은 플로리다의 세인트 어거스틴에 예수희 소속 가톨릭 사제 2명과 수사 6명 등 선교사를 파견하면서 북미대륙 선점에 나섰다. 영국보다 먼저 오늘의 캐나다를 통해 북미 대륙에 진출한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일대를 장악했으나 대영제국과 비버모피 사냥을 두고 패권을 다투다 패퇴했다. 그러나 유럽대륙에서 모피무역을 독점하던 러시아는 마침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일대에서 사냥감이 바닥나자 바다를 통해 캘리포니아 만 일대에 진출했다. 러시아 제국은 태평양 연안에서 비버, 수달같은 값비싼 동물을 사냥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북쪽 멘도시나의 러시안 리버 연안에 정착촌을 세우고 포도농원을 가꾸며 북미 대륙에 정착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제국은 캘리포니아에 정착촌을 세우기에는 물리적으로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러시아는 급기야 알래스카를 헐 값에 미국에 팔아넘기고 정착했던 소노마 일대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금단의 땅’ SF 만에 병사와 가족이 정착
이처럼 구미 열강이 알타캘리포니아 선점에 열을 올리자 소노라 일대를 뉴스페인 제국의 최변방으로 삼고있던 뉴스페인도 서서히 알타캘리포니아 정착에 열을 냈다. 힐라 강과 콜로라도 강에 막혀 더이상 알타캘리포니아 진출이 어렵던 뉴스페인은 키노 신부가 처음 육로를 통해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 이어 캘리포니아 초대 총독 개스퍼 포톨라가 샌프란시스코 만을 발견한 지 6년 후 뉴스페인도 알타캘리포니아 정착을 서둘렀다. 1775년 11월 투박 수비대 사령관 디 안자 2세는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 정착촌 건설을 허가해줄 것를 부카렐이 총독에게 청원했다. 총독은 1775년 11월24일 이를 허가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부카렐이 총독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착촌을 마련할 지부터 설명했다. 당시 알타캘리포니아는 부녀자와 어린이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다. 디 안자는 우선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 40명 규모의 이주희망자 중심으로 모집한 병사가 가족과 함께 상주하는 수비대를 세우고 병사와 가족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이루겠다고 했다.  또한 정착을 희망하는 일반인도 모집하겠다고 했다. 이주 희망자에게는 일정 금액의 월급과 양식, 장비 등 일체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이후 농지도 분양한다면 수해와 한발로 가난에 찌든 일반인도 쉽게 이교도의 위험한 땅으로 불러모을 수 있다 주장했다. 디 안자는 또한 모집한 수비대 병사들을 훈련할 중사와 상병과 일반인을 훈련할 병사 5명도 별도 모집하겠다고 했다. 디 안자는 대규모 이주단이 아파치들이 날뛰는 이교도들의 땅을 지나야하므로 탐험대와 디 안자를 도와 안전하게 정착민을 보호할 수 있는 노련한 병사 10명을 별도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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