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구미열강의 알타캘리포니아 쟁탈전 시작되다-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월 우기철이 오기 전 앞당겨 출발하겠다”
디 안자는 10명의 병사중 5명은 별도로 모집하고 나머지 5명은 테레나테 (Terenate) 수비대에서 선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탐험대는 신년 초가 되면 본격적인 우기철이므로 우기철이 오기 전 출발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병사와 이주희망자는 투박에서 6백 30마일 거리의 소노라의 북서부 도시 쿠리아칸 (Curiacan)에서 모집하고 식량과 장비 등 장비와 물품, 가축은 멕시코 소노라의 북-북서쪽 도시 호르카시타스 (Horcasitas)에 집결한 후 투박에서 마지막 점검을 끝낸 후 출발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같은 디 안자 사령관의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 정착과 수비대 설치 등 청원은 하루만인 1774년 11월 18일 뉴스페인 전쟁 평의회의 심의를 거쳐 부카렐리 총독이 정착촌 건설에 대한 칙령을 11월 24일 정식으로 공표하면서 승인됐다. 다만 부칼렐이 총독은 기존 몬트레이 수비대는 중위와 중사 그리고 28명의 병사로 유지되므로 만약 샌프란시스코 만에새 경비대를 세울 경우 기존 소노라의 경비대에서 필요한 병사를 선발하거나 차출해도 8명을 초과하지말라고 당부했다. 또한 이주 탐험에 필요한 병사선발은 디 안자 사령관에게 일임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 정착할 제2차 알타캘리포니아 탐험대의 부사령관에는 18년 경력의 호세 호아퀸 모라가 (Jose Joaquin Moraga)가 선임되었다. 모라가 중위의 부친은 디 안자 1세의 수비대 병사로 복무중 아파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번 탐험대에는 디 안자의 제 1차 탐험대에 참여했던 프란시스코 가르세 신부와 토마스 아이하츠 (Tomas Eixarch)신부가 기록관겸 종군 사제인 페드로 폰트 (Pedro Font) 신부와 함께 참여했다. 가르세 신부와 아이하츠 신부는 콜로라도 강까지 동행한 후 콜로라도 강 주변 원주민 사목을 위해 그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부카렐이 총독은 디 안자 사령관에게 콜로라도 강을 건너 알타캘리포니아 땅에 도착하면 즉시 샌프란시스코 만에 정착할 것을 당부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을 탐험한 일부 탐험가들은 샌프란시스코 근방에 강폭이 너른 긴 강 2개가 흐른다고 했다. 부칼레이 총독은 이같은 소문은 무시하고 무조건 샌프란시스코 만 주변에 정착하라고 당부했다.
이주자에게 생활비 지원, 토지는 우선 분양
이주 희망자를 선발할 쿠리아칸은 이주 희망자를 모집하기에는 알맞은 장소였다. 아열대 기후를 가진 소노라 주의 수도로 도시는 광산촌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도시로 가까운 과다라하라 (Guadarajara)나 멕시코시티와 유사했다. 북으로는 사막에 둘러싸인 원주민 언어인 선인장이나 사후아로 (Sahuaro)에서 비롯된 시나로아 (Sinaloa)가 있다. 남으로는 할리스코 (Jalisco)와 북으로는 소노라가 가까이 있어 이주자 모집에 용이했다. 당시 아직도 이교도에 둘러쌓인 변방 신천지로 정착을 원하는 이주 희망자들은 대부분 극빈자들이었다. 선발된 이주 회망자들에게는 일정 금액에 해당하는 물품이 지급되었다. 당국은 이주 희망자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현금 대신물품으로 지급했다. 현금으로 지급할 경우 자칫 노름으로 탕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병사로 선발된 남성에게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무기가 지급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남성은 거친 벌판을 개간하는데 필요한 노동력과 광부도 확보하면 소멸위기에 빠진 광산도 유지할 수 있어 그만큼 이주자 정착은 중요했다.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다는 샌프란시스코 만 주변은 일찌기 포톨라 지사와 세라 신부에 의해 북미대륙을 찾는 유럽의 이주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었다.
남성은 총,칼 – 여성에게는 속치마 무상 지급
이처럼 무장한 한 집안의 가장들은 어린 자녀와 아내와 함께 탐험길에 나설 수 있었다. 정착을 원하는 가장들은 평균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가정이면 평균 자녀수는 9명이었다. 당시 이주자들에게 마차는 없었다. 이보다 몇 년이 지나 캘리포니아 대륙에도 마차 바퀴가 굉음을 내며 굴렀다. 이주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기처럼 의복과 양식을 제공했다. 이들은 정착지로 이동 중이거나 행진 중 전 대원이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천막을 마련했다.
남성들에게는 멕시코 푸에블라 (Puebla)산 목화로 짠 속옷과 모자와 머리를 묶는 리번이 무기와 함께 지급되었다. 이주 희망자가 필요한 물품은 총독부 관리 돈 호세 디 에치베스트 (Don Jose Echeveste)가 세목별로 작성하여 총독 부카렐리에게 제출했다. 여성들에게는 특별히 프에블라 산 목화로 짠 흰색 속옷과 벨기에의 브루셀 (Brussel) 제품 스타킹, 모자와 모자 끈이 지급되었다. 어린 소녀에게도 어머니에 지급한 것과 동일한 속옷 등이 지급되었다. 성인 남성에게는 발포가 가능한 칼빈 소총과 긴 칼과 날카로운 창이 지급되었다. 또한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산카를로스 디 몬트레이 (San Carlos de Monterey)라고 새겨진 어깨띠가 지급되었다.
북미 대륙에는 아직 짐마차가 등장하기 전이라 탐험대원과 병사들의 짐은 노새 등에 실려 먼길을 떠났다. 노새 등에 짐싣기가 익숙하지않은 이주자들은 출발에 앞서 병사들로부터 하나하나 지시를 받아가며 짐을 싣고 또 행진이 멎으면 짐을 내리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기마대를 위해 13개의 텐트를 치고 정착민 서른 가족용 텐트 10개를 세웠다. 세 가족당 1개의 텐트가 제공 되었다. 또한 동행한 3명의 사제를 위해 1개의 텐트를 마련했다. 이후 동부에서 서부로 오는 이주자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짐마차를 몰았다
매일 소 한 마리를 잡고 브랜디를 즐겨
이들은 마차를 숙소나 적의 공격시에는 좋은 방패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행중 산모가 분만할 때는 마차는 좋은 병실이 되었다. 그러나 디 안자의 2차 탐험시 짐마차는 아리조나나 알타캘리포니아에서는 아직 달리지 않았다. 탐험대는 때가 되면 행진중 너른 평원 한편에 자리잡고 대형 철제 요리도구나 구리 주전자로 요리했다. 그리고 대형 솥에는 초코레이트 음료를 끓였다. 그리고 준비해간 식용 소 중에서 한 마리를 도축한 후 전대원이 즐겼다. 고기가 남을 경우에는 소금에 저장했다. 그리고 준비한 3 배럴 (* 1배럴은 119리터나 나무통 하나)의 브랜디를 매일 저녁 식사 중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준비해간 60톤 분량의 토티야 용 밀가루에서 일정량을 꺼내 토티야를 만들고 가지고 간 다량의 콩도 양식으로 사용했다. 대신 디 안자 사령관의 식탁은 좀 더 화려했다. 그의 식탁에는 햄이나 소세지가 오르고 후식으로 비스킷이나 한잔의 와인, 치즈, 후추, 신나몬 등 귀한 향신료도 올랐다. 이제 대위에서 중령이라는 고급 장교가 된 사령관에 알맞은 식탁이었다.
쿠리아칸에서 북쪽으로 향한 길은 멕시코 중앙 고원의 서쪽으로 향한 산자락에서 이루어진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 (Sierra Madre Occidental) 아랫자락 평원을 지났다. 이길은 고대서부터 원주민들이 몇세에 걸쳐 이웃 부족들과 교역하거나 어울려 생활하면서 다듬어진 길이다. 이길은 멕시코 고원을 지나 콜로라도 강까지 이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