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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투박을 출발, 콜로라도 강으로-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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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9월 30일 토요일부터 10월7일 토요일까지 (출발 2일부터 9일까지) 
제멋대로 대열을 이탈하려는 노새무리에 시달린 노새몰이꾼은 이날 아침도 노새들과 실랑이했다.그 사이 이주대는 행진을 중단하고 노새 몰이꾼이 달아난 노새를 잡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최근 디 안자와 종군 사목 폰트 신부사이는 냉기류가 계속되었다. 폰트 신부는 출발준비하거나 야영장에 도착하면 노새 등에 손수 짐을 싣고 또 짐을 내려야 했다. 이같은 일에 익숙하지 않은 폰트 신부는 그간 자신의 천막을 비롯하여 천막 받침대, 서적, 문서, 여러상자의 제의, 미사용구, 담요, 일상의복, 의자 등 노새 2마리의 몫인 짐 챙기에 곤욕을 치렀다. 이에 지친 폰트 신부는 디 안자 사령관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전담 시종을 배정해줄 것을 이미 2차례나 청했다. 그러나 이같은 폰트 신부의 요청에 대해 며칠이 지나도 디 안자는 묵묵부답. 짐을 싣고 내리는 일에 지친 폰트 신부는 드디어 노골적으로 디 안자에게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는 사이 한 소년이 엉뚱한 사건을 저질렀다. 이 소년은 아파치들이 야영장에 접근하여 말 세 마리를 끌고갔다고 소리쳤다. 곧 모라가 중위와 병사 4명이 말을 끌고 달아난 아파치를 찾아 벌판을 달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풀을 뜯던 말 4마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아파치들이 말을 몰고 달아났다는 말은 소년의 거짓말이라는 것으로 밝혀져 소동은 끝났다. 600여 마리의 말과 소떼, 그리고 노새는 아무리 목동과 노새몰이꾼이 능숙하게 몬다해도 무리를 이탈해 먹이를 찾아 대열을 이탈하는 것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동이나 노새몰이꾼은 달아나거나 대열을 이탈한 가축을 쫒느라 행열은 지체되고 대열은 자주 흩어졌다.
어느날 후미를 지키던 병사가 아파치 6명이 뒤쳐진 노새 한 마리를 끌고갔다고 보고했다. 디 안자는 중위 모라가에게 병사 10명을 지휘하여 노새를 되찾고 아파치를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한 밤중 모라가 중위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모라가는 아파치대신 사슴 사냥하는 피마인들만 보았다고 했다. 날이 가면서 이주인들의 노새 짐꾸리기가 점차 익숙해졌다. 일행은 며칠간 하루 15내지 20마일을 행진할 수 있었다. 계절이 10월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쾌청했다. 어느날 일행은 방목하는 소떼를 보았다. 디 안자가 허락하자 병사들은 소 몇 마리를 잡아 일행은 소고기를 넉넉하게 먹었다. 또한 사냥한 사슴고기도 요리하여 즐기고 남은 고기는 소금에 저장했다. 며칠후 일행은 위치가 북위 30도 8부인 산타아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행은 소를 키우는 목장에 야영장을 만들고 다음날까지 머물렀다. 잃어버린 노새 4마리를 찾아나선 병사들은 들판을 떠도는 한 마리만 발견했다.

1775년 10월 8일 일요일부터 10월 21일 토요일까지 (출발 10일부터 23일까지)
8일 디 안자 사령관은 전 대원을 2개 조로 나누어 출발했다. 제1조는 아침 9시 30분, 2조는 2시에 출발했다. 이곳은 산타마리아 막달레나 (Santa Naria Magdalena)에서 북동쪽으로 18마일 지점이었다. 각 팀은 각각 5시간 간격으로 전진, 목적지에 도착했다. 폰트 신부는 이곳에서 6 마일 거리 선교원에서 사목하는 친구 주니가 (Zuniga)신부에게 도착을 알렸다. 디 안자 사령관도 구면인 주니가 신부는 어둡기 전 일행을 찾았다. 세 사람은 함께 자리하고 식사와 담소를 나누었다. 9일 아침 두 신부는 이주대의 성공을 기원하는 아침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했다. 미사후 전 대원은 산이그나시오에서 하루를 보냈다. 수요일 일행은 고지대 피마 땅을 긴장한 채 아파치들의 습격에 조심하며 전진했다. 다음날 목요일 일행은 좁다란 구암부트 (Guambut) 계곡을 피해 적들에게 방어하기 좋은 지점을 택해 방어망을 세우고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이곳 구암부트 산자락은 아파치들이 말을 몰고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지형이었다. 동쪽으로 뻗은 길은 투퀴손 (Tuquison: Tucson)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토요일 일행은 오늘의 미국과 멕시코 국경인 노갈레스 (Nogales)를 지나 한밤중 라스라구나스 (Las Lagunas)에 도착했다. 디 안자는 폰트 신부에게 대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미사를 청했다. 아직도 전 대원은 인근에 발호중인 아파들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못했다.

디 안자 투박에서 2주간 탐험대 최종점검 
미사 후 폰트 신부는 인근 투마카코리 선교원으로 가서 이주대가 투박수비대에서 이주탐험대의 최종점검을 하는 2주동안 머물렀다. 월요일 폰트 신부 일행은 투박수비대에서 디 안자와 재회했다. 이 자리에서 폰트 신부는 탐험중 자신의 짐을 노새에 싣고 내리는 시종을 배려해달라고 디 안자 사령관에게 세번째 요청했다. 토요일 투마카코리에 머물던 세명의 사제는 탐험대가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마침 폰트 신부는 심한 몸살로 고생중이었으나 가르세와 아이하츠 신부와 함께 밤을 다투어 투박으로 향했다. 폰트 신부는 디 안자가 자신의 전담 시종을 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마음을 놓았다.  

1775년 10월 22일부터 11월 30일까지
1775년 10월 22일 일요일 (호르까시스타  출발24일)
폰트 신부의 웅변같은 강론으로 일요미사는 근 1시간가량 계속되었다. 들판에서 잘 자란 풀을 뜯던 노새나 말, 식용소들을 병사와 일반 이주자, 노새몰꾼들이 너른 광장으로 몰고왔다. 노새몰이이꾼들은 노새등에 이주자들의 개인 화물과, 천막, 화기 양식 등을 실었다. 출발 준비를 마치자 총사령관 디 안자가 짐 실은 노새를 한마리씩 세밀히 살폈다. 디 안자는 투박에서 30여 마리를 더 구입해 식용소는 모두 355마리가 되었다. 종군사제겸 기록관인 폰트 신부는 제2차 탐험에 동행한 가축은 말 340마리, 노새 165마리, 소 355마리로 모두 860마리라고 했다.
당시 디 안자는 미처 전해듣지 못했지만 1775년 8월5일 스페인 제국의 함선이 샌프란시스코 만 안으로 들어와 정찰했다. 길이 58피트의 산카를로스 호는 선장 매뉴얼 디 아얄라가, 조타수와 항해사는 돈 호세 가니자레스였다. 그는 포톨라 총독과 세라 신부의 탐험선에서 조타수를 잡은 바있다. 뉴멕시코 총독의 명을 받은 디 아얄라 선장은 4일간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를 탐험하고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는 항구와 해군기지가 들어설 최적의 장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육상을 통해 정착한 이주민과의 연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뉴스페인 총독에게 보고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을 통해 상륙한 누구도 지상의 누구와도 교통이 무난하다고 보고했다. 부카렐리 총독은 디 안자에게 제2차 탐험 허가를 내리기 전 이처럼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를 사전에 세밀히 정찰한 후 정착촌 건설을 허가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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